장산의 낡은 집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14년 째 해운대에 살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백사장에 간 것은 서너 번이 안 된다. 바다보다는 산이 좋다. 해운대 뒷산은 장산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밋밋한 그저 그런 산이지만, 올라가 보면 계곡도 있고, 폭포도 있고, 억새밭도 있다. 아! 너덜겅도 있다. 너덜겅에 앉아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확 트인다.
사는 데 지치면 이따금 장산을 오른다. 대개 2시간 정도로 짧게 다녀오지만, 오전 10시에 집을 나서 해질 녘까지 걸어야 끝나는 산행도 이따금 한다. 그런 날은 기장 쪽으로 가거나 내리 쪽 계곡으로 내려간다. 기장으로 가는 길은 울산과 해운대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로 터널을 파느라 산을 아주 망쳐 버렸다. 대낮에 벌건 속살을 드러낸 꼴이 보기 싫어 요즘은 내리로 내려온다. 내리는 좁은 계곡이다. 계곡의 중간에 들면 무슨 심산유곡에나 들어온 것처럼 산봉우리 사이로 하늘만 보인다. 가파른 길을 한참 내려오면 안적사다. 원효대사가 지은 것이라 한다.
안적사를 지나면 풀이 무성한 묵은 농토가 나온다. 내가 늘 참배하는 낡은 집이 거기 있다. 볏짚으로 엮은 지붕은 노인의 뺨처럼 움푹 꺼졌고, 검은 나무 기둥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몸을 비틀고 있다. 벽은 억새로 엮은 늑골을 드러낸 지 오래고, 늑골을 감쌌던 황토는 비와 바람에 떨어져 원래 저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억새 역시 비바람 속에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이곳에 집이 있었노라는 흔적만이 땅거죽에 희미하게 남을 것이고, 세월은 언젠가 그 흔적조차 지워버릴 것이다.
윤기의 「정상한화(井上閑話)」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한번은 영남에 갔다가 상사(上舍) 김용한을 만났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할 요량으로 서울에 자주 갔는데, 첫걸음을 했을 때 사거리에서 고대광실 높은 집을 보았지. 문 앞에 말이며 수레가 구름처럼 몰리고, 집 안에는 노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인의 분부를 따르느라 바쁘더군. 물어 보니, 아무 상공의 집이며, 아무 판서의 집이라 하더군. 한두 해 뒤 그 집 앞을 지나다 보니, 쓸쓸하고 황량하더군. 이상해서 물어보니, ‘주인이 죽어 자손이 집을 팔았다’고도 하고, ‘귀양을 갔다’고도 하고, ‘죄를 지어 벼슬이 떨어져 시골로 갔다’고도 하더군. 또 다른 곳에는 새로 부귀하게 된 집이 있었는데, 몇 년 뒤 역시 앞의 집안과 꼭 같이 되더군. 한 집에서 오랫동안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더군. 나는 언양에서 산 지 이미 여러 대인데, 여전히 물려받은 집과 농토를 지키고 밭 갈아 먹고 샘을 파서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조리고 산다네. 서울이란 곳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님을 그래서 알았지.” 내가 웃으며 답했다. “이 어찌 서울이 그렇게 만들었겠나. 역시 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일 뿐이네.”
그렇다. 고대광실 높은 집을 영원히 차지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이 땅에 잠시 들렀다 떠나는 미물일 뿐이다. 살아생전 내 집은 내 집이 아니다. 고대광실 높은 집은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도시의 아파트는 날이 갈수록 높아가고 호사스러워진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고을마다 와국( 瓦局)을 설치해 나라 안의 모든 집을 기와집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 말을 따라 쉬이 썩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아파트는 단단하여 썩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니, 반계와 성호의 말은 이제 이루어진 셈이다.
한데 어떤가. 장산의 흙과 돌과 나무로 지어진 그 낡은 집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자 불과 몇 년 만에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콘크리트 집은 쉬이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마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야 비로소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반계와 성호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꼴을 보고 무어라 할 것인가. 궁금하구나.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다산함께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茶山이야기] 이제는 목축업도 못하게 되네 / 박석무 (0) | 2010.04.18 |
|---|---|
| [다산포럼] 다산의 ‘아래로부터의 정치’ / 김태희 (0) | 2010.04.18 |
| [다산포럼] 에너지위기와 촛불정국의 진정한 해법 / 임성진 (0) | 2010.04.17 |
| [茶山이야기] 허물을 고치기만 하면 되는데 / 박석무 (0) | 2010.04.17 |
| [茶山이야기] 공정한 비판의 겸허한 수용 / 박석무 (0) | 2010.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