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아, 왜 여자 친구는 안 데려왔어?” “여자 친구 없어요.”
“너희 반에 여학생이 한 명도 없다고?”
“아뇨.”
“그럼 다음에는 여자 친구도 데려와.”
“네.”
절집의 저녁 공양 시간에 오간 대화라면 믿으실는지요. 부석사 주지이신 주경 스님과 인연이 닿아 함께 살게 된 네 명의 아이 중 한솔이의 친구 두 명이 놀러왔다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나눈 얘기입니다. 절집에서 밥 먹는 행위를 ‘공양(供養)’이라고 하는 이유를, 불교대사전도 이보다 직절하게 설명해 줄 수는 없을 겁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한솔이와 스님 사이에 경계 같은 건 없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밥을 먹기도 힘든 소통 부재의 시대상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공양간 벽에 부석사의 가풍(家風)을 함축한 듯한 글귀가 나무에 새겨져 걸려 있습니다. ‘백초시불모(百草是佛母).’ 그대로 새기면 ‘온갖 풀들이 다 부처의 어머니’라는 말이겠지요. 수덕사 만공탑에 새겨진 글귀를 그대로 옮겨 새긴 것이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부처의 성품이 깃들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열반경의 구절과 상통하는 말일 것입니다.
백초시불모의 정신은 공양간 건물 곳곳에 고스란히 베어 있습니다. 벌레가 파먹은 기둥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짜맞추어 넣은 나무 조각들이 그 어떤 보석보다 더 빛나 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방생(放生)이 아닐까요. 겉멋이 그대로 드러나는 누더기 옷이나,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만든 조각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참됨[眞]과 선함[善]과 온전히 포개진 그런 아름다움입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도비산(352m) 정상까지 산책하고 오자 상현의 반달이 안개 속에 희미합니다. 달빛을 머금은 이른 봄의 안개는 이제 곧 비가 되어 새싹으로 환생하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아이들 글 읽는 소리라 했던가요. 물론 요즘은 듣기 힘든 소리입니다만. 그런데 부석사에서는 그 소리가 낭랑했습니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혜탈지견향(解脫知見香)….” 저녁 예불을 드리면서 헌향게(獻香偈)를 읊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참 듣기에 좋았습니다. 그 소리에 이끌려 법당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예경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다섯 가지 덕인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 혜탈지견(解脫知見)을 향에 비유한 것도 백초시불모의 정신과 상통합니다. 향은 결국 향을 사른 사람에 베어들 테니까요. 공양 중에서도 향 공양을 으뜸으로 치는 것은 ‘공경과 나눔으로 자타(自他)가 하나 되는’ 공양의 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토벽이 고운 방 한 칸에 깃들고나서도 몇 번이나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달이 중천으로 떠올라 아직 빈 몸인 느티나무 가지에 걸릴 즈음에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평생 이런 곳에 살면 특별히 닦지 않아도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석사 하면,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영주 부석사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겐 아주 생소한 절이 서산 부석사입니다.
고건축박물관으로 불리는 영주 부석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절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절 이름의 한자가 같은 것은 물론 소재지도 똑같이 ‘부석면’으로 절 이름을 빌려 쓰고 있습니다. 의상 스님과 선묘 낭자의 절절한 사랑을 배경으로 하는 창건 설화도 같습니다. 전형적인 산지 가람으로 산기슭에 석축을 쌓아 터를 얻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대조적인 부분이 더 많습니다. 한 가지 예만 보자면 두 절 다 안양루가 있는데, 명품 건축물인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극적인 누하(樓下) 진입으로 주불전인 무량수전으로 참배객을 이끕니다. 이에 비해 서산 부석사의 안양루는 누각이란 편액만 달았지 사실은 단층 건물입니다. 외양도 소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자연적인 배경도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영주 부석사는 백두대간의 선달산에서 가지 친 봉황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소백산의 첩첩 자락을 펼쳐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산 부석사는 호서정맥의 백월산에서 가지 친 줄기가 태안반도로 흐르다 살짝 남쪽으로 흘린 구릉 같은 도비산(島飛山) 기슭에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천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 영주 부석사와는 전혀 다른 전망을 보여줍니다. 영주 부석사가 백두대간의 준령의 화룡점정 같다면, 서산 부석사는 서해에 발을 담근 희미한 산을 깊고 그윽하게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적 의미에서 두 절의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단순 비교의 대상도 아니거니와 우열의 차원으로 바라볼 일은 더욱 아닙니다. 두 절 모두 다른 차원의 절정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습니다. 봉황산 부석사에서 국사(國師)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면, 도비산 부석사에서는 누더기옷을 입은 고승의 비범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아주 간단합니다. 산자락을 구불거리며 오르는 길이 끝나는 곳에 석축으로 터를 얻은 전각들이 좌우로 벌려져 있습니다. 주불전인 극락전을 향해 돌아앉은 안양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돌계단을 오르면 종무소로 쓰고 있는 목룡장(牧龍莊)과 이에 연결된 심검당(尋劒堂, 현재 공양간으로 쓰고 있는 건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극락전 뒤로 좀 물러선 곳에 산신각이 있습니다. 기품있고 정갈한 모습으로 숲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심검당 왼쪽으로 조그마한 연못을 지나면 최근에 시민을 위한 선방 겸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지은 정진선원이 있습니다.
전각들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이 안양루와 심검당, 그리고 극락전인데 하나 같이 막돌기단에 덤벙주초입니다. 이 중에서도 심검당이 가장 돋보입니다. 예전부터 스님네들 사이에는 심검당과 목룡장의 이어진 모습이 누운 소, 즉 와우형(臥牛形)이라고 불리며 애정 어린 눈길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건물을 한국 최고의 누더기 건물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감히 한 마디 더 하자면 건축적 차원과는 별개로, 깁고 보태고 살려 쓴 그 검박의 아름다움 자체만으로 국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것을 그대로 살려 쓰면서 자연과 더불어 생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현재 스님들의 안목은 무분별한 대형 불사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일깨우기에 충분합니다. 2005년에 현 주지 스님이 5차 중수를 하면서 발견한 상량문으로 추정한 건물의 나이는 350년 정도라고 합니다.
목룡장과 심검장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라 불리는 경허 스님과 제자인 만공 스님의 자취가 베인 곳이기도 합니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뜻의 목룡장, 지혜의 검을 찾는 곳이라는 뜻의 심검당 편액은 경허 스님의 친필이고, 그 옆에 붙은 부석사(浮石寺)란 편액은 만공 스님이 70세 되던 해에 쓴 것입니다.
심검당의 자연미가 드물게 귀하다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허전합니다. 부석사의 자연미는 가람을 호위하듯 둘러싼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공명함으로서 그윽해집니다.
수령 300년 안팎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는 절의 지워진 역사를 증언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느티나무 너머 천수만과 더불어 부석사의 자연미는 비로소 완성됩니다. 부석사를 품에 안은 도비산(島飛山)이, 날아온 섬이든 날아가는 섬이든, 부석사와 느티나무 숲과 서해는 한 몸입니다.
부석사는 요즈음 사람들과 자연을 이어주는 일로 바쁩니다. 탐조(探鳥)와 들꽃 탐사를 곁들인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면으로 자연을 응시하게 하느라 그렇습니다. 천주교나 개신교인들의 호응도 좋다고 합니다. 대자연 앞에서는 종교의 같고 다름도 사소한 문제인 모양입니다.
부석사 마당에는 유난히 벤치가 많습니다. 자연의 설법을 듣고 가라는 뜻입니다. 까막딱따구리의 목탁 소리에 맞춰 철새들이 하늘에 쓰는 경전을 읽고 가라는 뜻입니다. 시름 다 내려놓고 푹 쉬었다 가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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