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실학산책] 이토 진사이의 고의당(古義堂) / 심 경 호

문근영 2010. 3. 30. 07:07

이토 진사이의 고의당(古義堂)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하, 이것이 그 유명한 ‘고의당’이란 말인가?


이토 진사이의 서실이었던 고의당을 찾아가 경내를 보려고 뒤로 돌아간 순간,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혼잣말을 하였다. 도로변에는 붉은 칠 대문이 버젓이 서 있었지만, 그 뒷켠에는 작은 터에 인근 주택의 자전거들만 세워져 있었다. ‘가미교구(上京區) 히가시호리가와도리(東堀川通) 시모다치우리아가루(下立賣上る)’의 그 지명을 읽기가 어려워 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이곳저곳 파출소에서 물으러 다닌 끝이라서 실망이 무척 컸다. 나무판에 페인트로 적어 유적의 내력을 설명하는 글을 읽고 나서도 낙담의 기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2003년 교토대학의 초빙교수로 있었을 때 일이다. 나는 연구년을 맞아 교토의 문화 유적을 전부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교토는 바둑판식의 조방제 구획이고, 위쪽에서 아래로 약간 비탈이 져 있을 뿐이라서, 시내는 자전거로 돌아다니기에 편하기에, 교통의 어려움도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세워 우리나라와 관련 있는 사찰, 신사, 학교, 유적지를 일일이 찾아보고,‘한국과 교토’라는 제목으로 나의 교토학을 세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역주 원중랑집』의 원고 때문에 숙소와 도서관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게다가, 노트북을 오랜 시간 사용하다가  순간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적도 여러 번이고, 누워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오래였다. 가까스로 원고를 마무리하고, 하도 아쉬워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며칠만이라도 교토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 한 곳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 괜찮은 일본 학자로 꼽은 이토 진사이의 유적지였다.



2. 

            

이토 진사이는 한자로 이등인재(伊藤仁齋)라고 적는다. 진사이 즉 인재는 호이고, 이름은 고레에다(維楨)다. 1627년에 태어나 1705년에 죽은 이 사람은 주자학을 탈각하고 일본적인 유학 사상을 수립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래 재목상의 아들이었지만, 11세 때 『대학』의 치국평천하의 장을 읽고는“지금 세상에 이것을 아는 자가 있으랴!” 탄식하고는 유학으로 한 시대를 울리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토는 처음에 주자학에 열중하였으나 중년이 되어 송대의 유학은 공·맹의 학과 괴리된 점이 있다고 의심하였다. 마침내 “『대학』은 공자가 끼친 책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명경지수(明鏡止水), 충막무짐( 漠無朕), 체용(體用), 이기(理氣)의 설은 모두 성인의 뜻이 아니라고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이토 진사이는 나이 서른여섯에 교토 호리가와(堀河)의 자기 집에 고의당(古義堂)이라는 서실을 열었다. 그리고 공자의 언행을 수록한 『논어』를 최상 지극의 우주 제일 서적이라고 부르고, 『맹자』는 그 우익(羽翼)이라고 현양했다. 그 사색의 결과를 『논어고의』와 『맹자고의』에 담았으므로, 그의 학문을 고의학(古義學)이라 부른다. 또한 호리가와에서 강학을 했다고 해서 굴하학(堀河學, 호리카와가크)이라고도 한다.


구마모토 히고(肥後)의 영주가 높은 봉급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토는 부모 시양을 이유로 사양했다. 이후 79세로 죽을 때까지 3천이 넘는 문도를 배출했고, 온화한 성품이어서 훈훈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토오가이(東涯), 다섯째 아들 란구(蘭 )는 고제이기도 했다. 장남 토가이는 호리가와 동쪽 끝에 살았기 때문에 한자로 동애(東涯)라 적는 호를 자칭했다.


이토 진사이 부자의 학문은 교토를 본거지로 하였다. 교토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일본 정신을 지켜냈다고 해서 세계 도시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곳이다. 그렇건만 교토는 이토 진사이 부자를 위해 아무 배려도 하지 않았다. 또 교토 조형예술대학에서 펴낸  『교토학에의 초대』(가도가와서점, 2002)을 보면, 에도시대의 유학을 다룬 부분은 제4장 제3절 ‘학예의 여명’ 가운데 ‘사숙의 전통’과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을 조명한‘세키몬(石門)의 심학’의 두 조항뿐이다. 이토 진사이에 대해서는 ‘사숙의 전통’에서 한 문단을 할당했다.


교토시가 고의당의 문짝만 간신히 보존해 둔 사실이나 교토의 문화전통을 다룬 서적에서 이토 진사이를 위해 고작 한 문단을 배정한 사실은 일본 유학의 현주소가 어떠한지 잘 말해준다. 일본의 사상과 문화에서는 불교가 우세하고 신도가 기저에 놓여있고 유학은 전근대의 한 시기에 실험적 사유로 끝났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이토 진사이에 대한 관심이 현대 일본인에게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재해석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더구나 이토 진사이에 대한 논문은 대만이나 중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 매년 서너 편씩 나온다. 나는 일본한문학을 중점 연구하는 이쇼가크샤(二松學舍)대학의 COE프로그램에 간여하였고, 그 때문에 외국내 일본한문학 연구 동향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최근 여러 해 동안 열람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다산 정약용에 관한 추앙이 남다른 우리의 사정과 비교가 된다. 다산학을 지원하는 학술재단이 있고, 다산의 호를 사용하는 대학 건물이 한둘이 아니며, 콜 센터까지도 다산이란 이름을 사용한다. 하지만 다산학은 국내의 범위를 넘었다고 할 수 없다. 외국 학자들이 다산을 공부한 논문은 여전히 드물다. 내부의 논의도 진정으로 활성적인 것은 아니다.           


왜 이럴까?



3. 


고전의 연구는 선언이 아니라 원리와 방법을 탐색해야 한다. 목록 작업을 넘어서서 키 워드를 창출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을 삶에 봉사하는 기술로 생각했던 선인의 기획을 이해하려면 도덕주의적 질곡을 벗어난 창조적 해석과 외부 사상의 흡수·소화 양식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절실하다. 나아가 내부의 논의를 충실하게 만들면서 외부의 소리까지 받아들여 선인의 기획을 현대에 살려내야 할 것이다.              


사실, 유적지를 보호하고 기념관을 웅대하게 짓는다고 전통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적에 대한 물질적 집착은 선인의 지적 활동을 기념비적 역사의 한 요소로 환원시킬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다산학술재단의‘정본 여유당전서’편찬 사업은 지성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60년대 『고증판 니체 전집』이 니체 연구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듯이, 이 정본 사업은 풍요로운 결실을 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기는 해도, 그 겨울에 돌아본 고의당은 흉물스러웠다. 유적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식으로 방치한다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