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한라산 철쭉의 장원에서

문근영 2010. 3. 3. 07:15

한라산 철쭉의 장원에서


진달래가 봄의 전령이라면 여름의 전령은 철쭉일 터이다. 예전의 오월은 여름이라기에는 때 이른 감이 있었지만 요새는 더위가 빨라서인지 오월도 한 여름 같아 오월의 문턱에서부터 피어난다. 낮은 산들과 달리 고산지대 철쭉은 오월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진홍의 빛깔로 단장하기 시작한다. 지리산, 소백산이 그러하듯 한라산 1700고지또한 6월에 접어들어야 제대로 핀다.

 

지난겨울, 한라산 설경 촬영차 윗세오름에 올랐을 때 눈에 묻힌 키 작은 철쭉을 보며 날이 풀리면 고운 꽃을 피워 내겠구나 싶어 촬영을 하기로 마음먹어 두었었다. 겨울이 지나 한라산 철쭉 소식을 확인하고 나서 때 맞춰 찾았더니 하늘이 맑고 빛이 좋아 사진 찍기에는 딱 제격이어서 이것도 복이려니 했다.

 

13.jpg

 

아침 일찍 어리목 대피소에서 숲길을 들어서자 청량감이 감돌았다. 울울창창한 숲길을 한 시간 정도 오르자 활엽수들이 드문거리고 이내 검은 구상나무들 사이로 푸른 하늘이 열렸다. 만세동산 맑은 물로 목을 축이고 윗세오름까지 완만한 길을 따라 올랐다.

 

마음은 설렜지만 보이는 건 영 아니었다. 고대하고 바라던 철쭉은 간데없고 길 따라 노란 산죽 사이에서 드문드문 박혀 있는 채 이제야 겨우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24.jpg

넓은 구릉과 오름 저편에 검은 한라산 분화구가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듬성듬성 피어있는 철쭉은 내가 생각하는 한라산의 대표적인 영상이 아니었다. 한라산 분화구를 배경으로 화려하게 피어 있는 철쭉만 떠올리며 찾았는데 말이다. ‘아하 틀렸구나!!’ 며 사진기만 만지작거렸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한숨을 돌리고 영실 쪽으로 내려서는데 이게 웬일~~? 오름을 돌아가자 남쪽 능선에 철쭉이 만발해 있는 것이 아닌가. 완만한 오름 등에는 온통 진홍의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지고 기쁨이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을 찾는 눈은 빛나고 마치 미술품을 훔치려는 도둑같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선작지왓의 채 피지 않는 철쭉 포기들과 우람한 한라산 남벽을 배경으로 한 철쭉사진의 포인트를 발견한 것이다. 완만한 오름 등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04.jpg

05.jpg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한라산 철쭉의 제일경인 선작지왓은 아직 일러서 토실토실하게 수줍은 듯 꽃봉오리들만 봉긋 거리고 있었다. 한라산 철쭉 촬영의 포인트인 선작지왓은 검은 한라산 남벽 분화구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사진작가들이 찾는 꿈의 촬영 지점이지만 지금은 출입금지 구역이어서 이곳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고산지대의 꽃들은 참으로 곱고 화려하다. 영하의 추위와 눈의 무계와 강한 바람에 시달린 탓이리라. 악조건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자람이 억제되어 키가 작고 옆으로 둥글게 퍼져 잘 가꾼 정원수 같이 예뻤다. 어느 정원사가 이토록 아름답게 전정을 할 수 있을까? 역경을 이겨낸 모든 것들은 아름답기 마련이다.

 

02.jpg

이곳 철쭉은 모두 진보라이거나 진홍의 빛깔이다. 아직 피지 않는 봉오리들은 끝이 토실토실하고 검붉어 선정적이기도 했다. 화려한 꽃들은 제 빛깔만으로도 눈이 부시는데 구상나무와 눈향나무 사이에서 바위솔과 시로미들을 깔고 철쭉의 푸른 잎들과 어우러져 보색대비를 이루다 보니 더욱 곱고 화려했다.

 

그냥 흐드러지게 무성히 자라 키 자랑을 하는 내륙의 산철쭉과는 빛깔에서나 형태에서나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내륙의 산등을 덮고 있는 철쭉의 몰개성적인 형태와 다르게 그루마다 자기 수형을 이루어 함께 어우러진 것을 보며 각각의 다름이 모여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가장 멋진 앙상블이라는 것을 이 곳 철쭉이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15.jpg

22.jpg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도 있지만, 나는 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아직 본적이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의 마음이 저토록 고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는 아직까지 아름다움이 내면화된 진정성 있는 사람을 못 만난 탓일 터이다.

 

촬영을 마치고 아쉬운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영실 쪽 길을 따라 내려  갔다. 건너편 초록의 능선 따라 병풍바위와 장군바위를 둘러친 기암괴석 벼랑마다에도 선홍의 철쭉들이 곱게 피어 있었다. 진한 녹색의 장원에 박혀 있는 철쭉은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들이었다.

20.jpg

 

기암절벽에 위태위태하게 뿌리내리며 피어 있는 꽃을 보니 헌화가(獻花歌)가 생각났다. 어여쁜 수로부인의 청에 소를 몰던 늙은이가 벼랑의 꽃을 꺾어 주었다는 것을 보아 아름다운 여인을 향한 단심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터이고 또한 나이와는 무관하나 보다.

‘짙붉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아두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이다’

 

14.jpg

 

혼자 피식 웃으며 영실 가파른 길을 타고 내린다. 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젊은 여자가 노인네에게 꽃 한 송이를 바라겠는가. 또 어느 남자가 낯모를 여인네에게 제 목숨을 걸고 벼랑의 꽃을 꺾어 주려하겠는가. 나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사 족

제주도는 말고기 요리가 일품이란다. 옛날 말이 귀할 때는 법으로 금지를 했지만 지금은 식용으로 기른다니 좋은 시절이 되었나 보다. 돌아 오는 길에 우리 일행은  성읍마을 외진 작은 식당에 들려 푸짐하게 차린 말고기에 술한잔 기우리는 낭만도 가졌었다. 바스메란 솟아오른 산을 말한다니 오름을 뜻한 말일 게다.

22.jpg

 

 

                                                           2009. 6. 1  Fo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