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한국시 어디로 가야하나?/강희근

문근영 2010. 1. 21. 13:45

 한국시 어디로 가야하나?


 강 희 근(시인. 경상대 명예교수)



1.

오늘은 시의 날이다. 올해가 제22회가 되고 진주에서의 행사로는 5회째가 된다. 시의 날은 한국시인협회와 한국현대시인협회가 ‘소년’지의 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현대시의 기점으로 잡고 그 발간일인 1908년 11월 1일을 기념하고자 제정했다. 현대시의 기점을 1908년으로 잡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1898년 이승만의 <고목가>가 발표되고 190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해조신문’에 신체시가 발표된 것으로 보았을 때 1898년부터 1907년의 10년 사이가 한국 현대시의 기점으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를 흔히들 현대시 100년으로 잡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110년이 되는 해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현대시 1세기는 무던히도 발전과 변화라는 고삐를 쥐고 쉴새없이 달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세기말적인 흐름의 혼융이 있기도 했고 이념의 깃발 아래 시의 형상이 짓눌려지기도 했고 실험의 과도한 언어 흔들기가 방법만의 방향으로 치달아 오르기도 했고 순수의 흐름을 잡아 지나치게 온상 지향의 나태에 빠지기도 했고 전쟁을 맞아서는 한 쪽에 편드는 갈라서기의 흐름을 붙들어 보기도 했다. 가치 부재의 실존의 늪에서 허덕이기도 했다. 사회가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순수와 참여의 2분법에 목을 매기도 했고 독재 정권의 그늘 아래서는 민중주의가 세력을 전반으로 확대하기도 했으며 정권이 민주화 되면서 신서정을 부르짖는 것은 잠시 의식과잉이나 부도난 존재에의 표정과잉에 허덕이면서였다.


천천히 하늘을 뒤덮던 어둠이 뚝뚝

제 살점들을 끊어 떨어트린다

추락하던 살점들이 폭죽처럼 터진다

허공을 적시며 어둠의 진액이 흘러내린다

코흘리개를 모두 떠나보낸 놀이터에도 어둠이 고인다

농도가 옅은 곳으로 졸졸 흐르는 어둠

놀이터 한 구석에서 졸고 있던 그의

발목을 적신다 어둠에 쓸려온 신문지가

그의 외다리에 미역처럼 칭칭 감긴다

몇 년째, 찌그러진 그의 등허리는

부풀어 오를 줄 모른다

그는 이빨이 닳아 없어진 입을 벌리고

모래 섞인 바람을 들이마신다

호흡할 때마다 끊어질 듯 휘파람 소리가 난다

군데군데 검버섯 핀 살갗에 차가운 땀방울이 맺힌다

입가에 매달린 가래침들이 축축해진다

용접이 시원찮았던 상처의 틈에는

일 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거미집이 세들어 있다

그의 몸속을 탈출하려던 구더기들이

거미줄에 걸려 아우성친다

온전히 다물어지지 않는 그의 항문에서는

배설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 아래서 쥐 한 마리 목을 축이고 지나간다

술 취한 사내가 그의 입 속에 머리를 처박고 토한다

그의 탄력없는 뱃가죽이 급격히 팽창한다

출렁출렁 어느새 차오른 어둠이 그의 입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의 배가 찢어진다

− J씨의 <쓰레기통> 전문


따옴시 <쓰레기통>은 암울한 맛을 내고 있다. 어둠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그러하고 쓰레기통에 들여오는 온갖 쓰레기들의 쇄말한 현상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시로서는 난해하지 않고 비교적 온건한 문법과 흐름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따옴시에서 우리는 시를 왜 쓰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쓰레기통이 찌그러지고 입을 벌리고 축축해지고 거미집들이 들어오고 구더기들이 거미줄에 걸리고 밑둥에는 배설물이 흘러내리고 취객이 토하고 마침내 배가 찢어진다는 내용을 27행에다 담고 있다. 시인은 세상이나 시대가 만원사례 쓰레기통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것들의 리얼한 현상들을 카메라로 세밀히 찍어나갈 때, 그 통과함이 어떤 이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점을 환기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시인의 시적 진실이나 정체성 내지 진정성을 짚어내는 데에 대한 효율성이 턱없이 떨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무뚝뚝하다. 어쩌면 이 시는 그 온건성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는 절대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어쩌면 시가 복잡하고 난해의 늪이라는 인상을 더해주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쓰레기통> 같은 시는 오늘날 동어반복같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보다 더한 칙칙한 비시적인, 비서정적인, 그리하여 난해 그 자체인 시들이 오늘의 시라는 모습으로 커트라인 없는 시단의 불감증에 가학적인 완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3.

어쨌거나 우리는 현대시 100여년의 세월을 딛고 심각히 반성문을 써야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아래 4가지를 제시하면서 우리 시의 마당을 새로이 쓸면서 미래를 기약해 보고자 한다.


1) 전반적으로 서정의 회복이 필요하다.

오늘의 시는 전통 서정을 노래하는 사람이 변방으로 밀려나 있고 딱딱하고 머리 치고 신경 과민의 편협한 시정들로 가득해 있다. 이론을 갖춘 실험 계열의 시들은 그것대로 발전의 행로를 가야 하겠지만 모든 시들이 그런 모습으로 간다는 것은 시의 진정성을 깨고 다 함께 살벌한 동토의 들판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찍이 북한에서도 당파성 일변도에서 서정 회복의 기치를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바 있고 우리도 신서정(新抒情)이라는 슬로건을 내건지도 제법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 뿐이고 구체적인 신서정의 운동성은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고 있다. 서정은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바탕이면서 출발점이기도 하다. 시라는 것이 흉한 인상으로 거칠은 벌판을 야수처럼 나다니고 있으니까 이를 비평하는 비평들도 논리의 틀을 논리로만 밀어부치는, 말하자면 상상과 감성 부재의 덧붙이기만을 일삼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2) 시에 동시나 시조시를 원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현대가 아무리 복잡하고 예측불허의 양상을 띤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서정적 내질은 변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 서정적 내질은 동시와 시조시 같은 단순성이나 정형적인 호흡에 잇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삐 풀린 말을 풀린 채로 내버려두면 그 말은 어디로 갈 것인가? 가다가 뛰다가 쉬다가 어떤 바위나 나무에 고삐가 걸리고 친친 감기고 그러다가 숨통이 조여 끝내는 죽고 말 것이다. 어린이의 서정이 어린이의 것이므로 급수가 낮아 성인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단순성 안에 윤리가 있고 꿈이 있고 ‘별 헤는 밤’이 있다. 성서에서도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되지 않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이힐을 신고서 누나가 온다

운동화를 신고서 누나가 온다

고무신을 끌고서 누나가 온다

모두 모두 다 다른

가까운 길

먼 길


비단옷을 차리고 엄마가 온다

양장을 뽐내고 엄마가 온다

넝마를 걸치고 엄마가 온다

모두 모두 다 다른

넓은 길

좁은 길

− 윤극영의 <길> 전문


시인들이 매일같이 동시를 읽고 또 읽으면 어떻게 될까? ‘누나’와 ‘엄마’가 있는 유년의 오솔길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무엇이나 계산으로 재는 머리 굴리기로부터 떠나오게 될 것이다. 단순성은 시적 발상의 원형이다. 원형에 손 닿는 이는 원형 때문에 삿된 이미지나 상상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원형은 자칫 미성숙으로 보이기는 하나 성숙을 좌우하는 표지판일 수 있다.


시조를 흔히 민족시라고 한다. 민족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함께 민족이면서 민족을 경시하기도 한다. 자기 모습이 A인데 사람들은 자칫 A로 받아들이지 않고 B나 C로 받아들인다. 쉽게 말해 보자. “당신은 당신의 고향을 고향으로 받아들이는가?”라는 물음은 물음이 되지 않는다. 고향을 고향으로 치지 않는 사람은 어긋난 사람이다. 한참을 어긋나다 보면 자기가 자기인 줄을 놓치게 된다.


야윈 일년생 화초들이

바람 부는 쪽으로 넘어져 있다

자세히 보니

보름 전에 닿은 누님의 편지처럼

목 부분엔 이미

이슬이 어려 있었다.

− 이우걸의 <가을 입구> 전문


이우걸은 시조작가인데 최근 ‘아, 마산이여’라는 이름의 시집을 내어 화제가 되고 있다. 오랜 세월을 시조의 틀을 통해 언어와 정서의 결합을 꾀해 왔다. 시조를 매만지면서도 시조를 현대적인 형상의 틀로 재구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어느날 그는 시와 시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체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도 이제 그의 재능과 체험의 인자들을 보따리에 싸들고 시조쪽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넘치는 상상을 대패로 깎고 지나치게 풀어지는 허리띠를 3장6구로 조여보면 어떨까 한다. 현대 시인이 시조의 문을 따고 들어가면 새로운 경지가 열리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겠다. 밑지게 될까? 계산이 서지 않는다 할까?


3) 적정한 비유체계를 세워야 한다.

반서정이나 의식의 과잉이나 지나친 중첩 이미지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알맞은 비유체계를 세워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의 흐름이 대체로 기.승.전.결로 흐른다고 볼 때 각 맥락에서 하나의 메타퍼나 상징을 활용하면 어떨까 한다. 창작적 전략은 아직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나친 중층구조 내지 겉돌기만 하는 발상적 이미지를 방어한다는 초보적인 시안에 불과한 것이다.


4) 디지털 시대의 영상언어와 난해시 사이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현대를 디지털 시대라 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의 영상 매체와 전달 기기들이 첨단화 쪽으로 발전의 속도를 내고 있다. 일주일이나 한 달이 그런 기기들의 발전 마디를 이룬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의 보폭이 크다. 앞으로 언어예술이 이런 속도에서 제대로 견뎌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다.

그런 틈바구니를 비집고 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없이 쇄말화되면서 영상에서 소리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가는 퓨전미학에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서는 극과 극 사이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언어예술의 본령을 지키면서 새로운 시대의 퓨전미학과 교섭할 수 있는 열려있는 서정과 표현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앞 1) 2) 3)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본 것이다.


4.

양주동은 자기의 학문이 “송장이 되어 떠내려가게 될 것이다”라고 예단하면서 스스로가 “송장이면서 송장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문제다”라 한 바 있다. 오늘의 현대시를 두고 평론가 윤재근은 앞으로 50년 내지 100년이 지나면 모두 정리될 것이라 예언한 바 있다. 마치 조선시대 500년의 한시(漢詩)가 학문 밖에서는 오늘날 모조리 정리된 것과 같이 그렇게 정리 청산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소름끼치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간에 ‘송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소정의 몫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시의 날이요 현대시 한 세기를 넘기는 어우름에서 시는 숨가쁜 운명의 고비에 서 있다. 시인도 깨어나고 비평가도 깨어나고 문학사가도 깨어나고 시학 교수들도 깨어나라. 미루지 말고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