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책 만들기의 뒷풍경을 1년여(45회~50회 내외)에 걸쳐 <오마이뉴스>에 연재한다. 그는 이 연재를 통해 함석헌, 마르크 블로크, 윤이상, 에릭 홉스봄, 최명희 등 지난 30여 년 동안 수많은 독자들에게 지적 자극과 공론을 일으켜왔던 책의 역사는 물론, 지금 이 시대에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한 출판인의 모습, 그리고 우리 출판문화의 앞으로의 지향점까지 폭넓은 이야기를 다룰 생각이다. <편집자 주> |
그는 늘 꽃과 나무를 가꾸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늘 꽃삽을 들고 계셨다. 봄·여름·가을에는 그 꽃삽으로 정원의 나무와 꽃을 다듬으셨고, 겨울엔 온실에 들여 놓은 화분들을 손질하셨다. 온실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고 방안은 난들과 그 난들의 향기로 가득했다.
저 엄혹한 1980년대에 나는 나무와 꽃을 사랑하는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님을 뵙고 말씀을 듣는 행운을 누렸다. 한길사는 <함석헌전집> 전 20권을 1983년부터 1988년까지 6년여에 걸쳐 출판했다. 선생님의 삶과 사색, 말씀과 글은 한국 현대사가 창출한 가장 빛나는 문화유산이다. 전집을 진행하면서 나는 1주일에 한두 번씩 선생님을 뵙곤 했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댁을 찾을 때마다 선생님은 늘 손에 꽃삽을 들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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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선생님(1980년대 중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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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
| 6년에 걸쳐 만든 <함석헌전집> 전20권
함석헌 선생님의 성찰과 행동, 말씀하기와 글쓰기는 60여 년에 걸친다. 선생님은 1901년 3월 13일 압록강 하구인 평안북도 용천(2004년 4월 열차 폭발사고가 일어난 곳)에서 태어나셨다. 3·1운동에 참여한 다음 다니던 평양고보를 스스로 그만두고, 오산학교에 가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우고, 오산학교에 부임해 민족혼을 가르치다 일제에 의해 투옥된다. 해방 후에는 소련군에 의해 수감 당하고 월남 후엔 자유당에 의해 다시 구속됐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박정희 군사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고, 80년대에는 다시 신군부와 맞서다 1989년 2월 4일에 서거하셨다.
"도시에서는 상리(商利)가 나오고 농촌에서는 사상이 나온다"는 말씀을 선생님의 강연에서 들은 적이 있지만, 선생님에게 나무와 꽃은 사상과 정신의 뿌리였다. 선생님이 남긴 수많은 말씀과 글에는 늘 나무와 꽃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죽었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972) "새로 돋아나는 싹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습니까" (1973) "이른 봄 찬바람 속에 피는 수선화를 보십시오. 연하기 그지없는 것이라도, 세상 어떤 독재자의 손을 가지고도 그 황금입술의 나풀거리는 것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숨, 계절의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수선화에게 배우라>, 1975)
1988년 <함석헌전집>을 만들었던 나는 다시 1996년 1월 한길사 창사 20주년을 맞아 <함석헌선집> 전 5권을 만들었다.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과 <씨알 생명 평화> 같은 함석헌 연구논집 등 일련의 책들을 기획한 나는 선생님과의 그 어떤 운명 또는 인연을 나름대로 축적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 어린시절의 우상, 출판사 대표로 만나다
나는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함석헌 선생님의 이름을 알게 됐다. 부산에서 사범학교에 다니던 형님이 선생님 이야기를 늘 해주었고 나는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형님이 읽던 <사상계>를 읽어보려 했다.
1964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선생님이 강연을 하시면 늘 쫓아갔다. 1961년 <사상계> 6월호에서 박정희 군사 쿠데타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군사통치를 반대했던 함 선생님은 1963년 6월부터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나섰다. 서울 효창운동장과 광화문 시민회관, 대광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선생님의 강연은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972년의 10월 유신이라는 전대미문의 폭압적 통치로 정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 상황을 개선하고자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이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하고 나섰지만 그들의 운동은 강제로 중단됐다. 그리고 1968년 12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던 나는 1975년 3월 동료들과 함께 집단으로 '해직'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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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전집> 20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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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
| 그렇게 해서 한길사가 탄생했다. 1978년 여름 서울 원효로 댁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책을 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때도 꽃삽을 들고 나무와 꽃을 돌보고 계시던 선생님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결국 1983년에야 전집 작업으로 함석헌 선생님과의 인연이 크게 엮어졌다.
<함석헌전집> 편집위원회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천신만고 속에 발행됐던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회가 계승했다(선생님이 내던 <씨알의 소리>는 5·16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바로 안병무·계훈제·고은·김동길·김성식·김용준·법정·송건호 선생 등이다.
당초 안병무 박사가 우리에게 넘겨준 전집의 원고 분량은 10여 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료를 검토하면서 선생님의 많은 글들이 빠진 것을 알게 됐고, 나는 간행을 진행하면서 자료를 보완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전집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 자체가 출판인으로서 큰 긍지와 보람이었다.
선생님의 저작 활동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에 걸쳐 이뤄졌다. 때문에 일제시대와 남북 분단시대의 격랑 속을 산 선생님의 저작과 말씀을 20권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일제와 남북의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투옥되고 수난 받는 가운데 상당한 분량의 원고가 유실됐다고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짝을 이루는 큰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도 유실되고 말았으며 해방 직후부터 계속된 '노자·장자 강의'도 책으로 엮이지 못했다.
'함석헌'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
1988년 전집 완간을 기념해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말씀을 듣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해 봄 1주일에 걸쳐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던 한길사 세미나실에서 선생님의 연속강의가 열렸다. 함석헌 선생님은 판서를 하시면서 '씨알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우리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 생명과 평화, 민족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장례식에도 참례하지 못했다. 마침 그때 나는 베를린의 윤이상 선생님 댁에서 윤 선생님의 음악전집 출판을 위한 자료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동두천에 있는 선생님 묘소로 가서 참례해야 했다. 선생님 장례식에서의 안병무 박사 추도사를 우리 출판사가 펴내던 책소개 잡지 <한길 책 이야기>에 전문 게재했다.
선생님이 서거하시기 전에, 선생님의 모습과 말씀을 KBS에 남기게 하는 데 나는 약간의 노력을 한 바 있다. 나는 KBS 친구들에게 선생님의 모습과 육성을 KBS가 기록해놓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KBS는 국가 방송이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민족의 큰 사상가를 기록하는 일은 하나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KBS는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그램에 선생님을 세 번인가 모셔 '기록'으로 남겼다. 참으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함석헌 선생님의 글과 말씀, 사상과 정신이 우리의 현대사가 창출한 빛나는 문화적 성취라면, 선생님의 글과 말씀, 사상과 정신을 담은 <함석헌전집>은 우리의 빛나는 문화유산일 것이다. 나는 1993년 5월 선생님의 전집을 고급 양장본으로 제책해, '장서본' 500질을 펴냈다. <함석헌전집>은 1980년대에 활판으로 인쇄했는데 90년대에는 이미 활판인쇄소가 사라져 나는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활판인쇄소 한 곳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아울러 선생님의 강연을 CD 8장에 담아내는 기획을 했다. 선생님의 육성 또한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1990년 한길사는 서울 강남 신사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서 나는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인 박상률씨 등과 3년 동안 '함석헌사상연구회'를 진행했다. 함석헌사상연구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은 매달 한 번 모여 서너 시간씩 선생님 책을 '독회'하는 모임이었다. 3년 동안 우리 회사 회의실에 모여 선생님의 글을 번갈아 낭독하고 토론하면서 우리는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 문장과 말씀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이런 낭독을 통해 우리는 선생님의 문체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입말과 글말을 일체화한 함석헌 선생님의 문체야말로 그 사상 못지않게 주목돼야 할 문화유산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도 함석헌 선생님의 문체 또는 수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한 번 쓰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신 바 있다. 그리고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장 쓰기>를 써낸 이오덕 선생님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두 분 모두 그 작업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조만간 다른 연구자들이 '교향악 같은' 선생님의 글과 말씀을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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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초반 함석헌 선생님 창동자택에서 선생님과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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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
| 20년 만에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했소!
1985년 6월 13일 함석헌 선생님의 85회 생신을 축하하는 모임이 이화여대 후문의 한 음식점에서 열렸다. 전집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여러 참석자들이 노래하나 하시라니까 선생님은 같이 부르자면서 '나의 살던 고향'을 부르셨다. 꽃삽을 들고 꽃과 나무를 가꾸는 정원의 할아버지는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수줍음 많은 함석헌 선생님은 정신의 협객, 사상의 협객이기도 하셨다. 평소에는 가타부타 별 말씀 없으셨지만 일단 씨알들이 운집한 강연회의 연단에 나서면 선생님은 씨알들의 영혼을 울리는 말씀을 한 여름날의 폭포수같이 쏟아내셨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늘 '함석헌 할아버지'를 모시고 말씀을 들으려 했다. 저 70년대 초반에 전태일이 노동자의 권리를 호소하면서 분신했을 때도 맨 먼저 달려가셨던 선생님이셨다. 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에 선생님이 어딘가에 가서 모임이라고 하고 말씀이라도 하려고 하면 경찰은 선생님을 못 가시게 '연금'하곤 했다.
1987년 봄, 선생님은 그 '연금의 망'을 뚫고 서울대에 가셔서 강연을 하셨다. 강연 전날 밤, 학생들이 학교 쪽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이튿날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에 진입,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강연하셨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강연하는 그날 아침에 선생님을 '자택 연금' 하려 했지만 댁에 계시지 않아 당황했다고 한다.
"20년 만에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했소."
댁으로 찾아간 나에게 선생님은 통쾌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협객의 사상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비호 같이 행동하셨고 두려움 같은 걸 모르셨다. 군인들이 탱크 몰면서 총칼 들고 쿠데타를 했을 때도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에서 "나는 총칼 든 군인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하셨다. 1950년대 후반 자유당이 마지막 패악을 저지를 때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이승만 정권을 질타했다. 이것이 바로 들사람의 용기와 사랑, 정의와 진리의 편에 사는 협객의 사상과 용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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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너무 헤퍼요. 노자는 물자를 아껴 쓰라고 했지요."
선생님은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광고 전단지를 적당하게 잘라 실로 꿰매고는 인쇄되지 않은 면을 메모지로 사용하셨다. 함석헌 선생님은 휴지 한 장 함부로 버리지 않으셨다.
'타다만 <해전사>'와 동백나무
1987년 선생님이 외국 여행 중일 때 댁에 화재가 발생해 선생님의 귀중한 책들을 비롯한 삶의 흔적 또는 메모·기록들이 모두 타버렸다. 그 메모지에는 강연하러 가기 전 말씀하실 내용을 정리되어 있기도 했다. 사실 선생님은 강연 전 골똘히 생각하고 준비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그것들도 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귀국하신 후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우리가 펴낸 <오늘의 사상신서> 등을 갖다드린 적이 있는데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모서리만 타고 만 책들을 그대로 서가에 꽂아두신 것이었다. 책 모서리는 탔지만 속은 타지 않아 조심스럽게 다루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사물은 소중해서 선생님은 하나라도 쉬이 버릴 수 없는 듯했다. 그처럼 어떤 존재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책을 만들면서 나는 선생님의 사진을 제법 찍어두었다. 동아일보사에서 같이 일하다가 1975년 함께 퇴사 당한 사진작가 임학권형과 중앙일보사에서 일한 바 있는 사진작가 황헌만형에게 부탁해서 선생님의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남겨두었다. 물론 우리 출판사에서 강연하시던 모습도 찍어두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사진들과 다른 사진자료들을 사진작가 박영숙씨가 작업해 2001년 선생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함석헌전시회'에 낼 수 있었다.
나는 파주 통일동산의 헤이리 마을에 집을 지어 이사 오면서 선생님이 가꾸시던 해장죽 몇 그루를 캐어와 정원에 심었다. 이 대나무는 선생님이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캐어다 뜰에 심어 가꾼 것으로 선생님 생전에 여러 사람들이 이 대나무를 분양 받아 가기도 했다. 나는 가끔 해장죽을 보면서 꽃삽을 들고 꽃과 나무를 가꾸던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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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선생님 댁에서 가져온 대나무를 필자의 집에 옮겨 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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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호 |
| 상당히 굵은 동백 한 그루도 옮겨왔다. 40여 년 선생님이 키우던 것인데, 겨울에는 온실에 넣어 보호해야 한다. 대나무도 그렇지만 동백도 선생님의 고결한 사상과 정신을 닮지 않았는가.
이제 나는 선생님이 키우던 보리수도 옮겨오려 한다. 좁은 마당에서 나무가 자꾸 자라면서 집을 덮고 있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선생님의 큰아드님 함우용 선생이 말씀했다. 선생님이 온실에서 키우던 선인장도 계속 자라 잘라주고 다시 잘라주지만, 그 가꾸는 일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자유 없는 시대에 어찌 사상의 발전이 가능한가
첫 전집을 만든 지 벌써 19년이 됐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새 함석헌전집'을 준비하고 있다. 한 시대의 우뚝 서는 사상가의 저작집은 계속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과 저술이 우리 민족 공동체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고전이라고 확신한다. 새롭게 편집하고 있는 <함석헌전집>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충분히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여행할 때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한 권씩 가져간다. 2월 19일부터 1주일간 프랑스 파리를 다녀오면서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갖고 갔다. 1970년부터 80년까지 <씨알의 소리> 권두에 실린 선생님 글을 모은 것으로 함석헌 사상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씨알의 소리>가 창간됐다 폐간되고, 법정 투쟁을 통해 복간됐다가 다시 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는 10년 동안 선생님의 고뇌와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는 어려운 시대를 성찰하면서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을 격려하는 시편이자 철학적인 단편으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선생의 고뇌와 열정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선생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글에 대한 권력의 감시가 참으로 교묘하고 구조적이라서 사상과 정신이 발전할 수 없다고, 자유 없는 시대에 무슨 사상과 정신이 발전하겠느냐고, 그래서 문장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문장을 다듬는 것이 자기 자신에 의한 또 하나의 사상적 검열 같다고 말이다. 이런 말씀을 떠올리며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면 50, 60년대보다는 70년대 글들이 더 거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역으로 더욱 생동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최근 나는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읽기로 했다. 선생님의 성찰을 통해 나는 70년대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흙, 씨알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가 부서진 것이다. 바위를 부순 것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흙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옵니다."
스스로 일군 '씨알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명과 자연의 이치와 씨알의 사상을 성찰한 선생님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야간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모산(毛山)에 밤비가 내리고'라는 어린이를 예찬하는 명문을 깊은 밤 비 내리는 모산의 그 공민학교에서 써내시기도 했다.
격동하는 역사를 혼신으로 부대끼면서 써낸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들사람 얼'이란 불후의 명문에서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힘찬 기상과 살아 움직이는 자태를 노래하고 있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술을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인사를 모른다, 체면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든,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다 썩어져가는 이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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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안암동 사옥에서 전집완간기념 강연을 하고 있는 함석헌 선생님(19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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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 '나라는 절대로 칼끝에 세우지 못한다'
선생님은 "나라는 절대로 칼끝에 세우지 못 한다"고 단언하셨다.
"칼끝에 쌓아올리는 그 탑, 그 부조리, 반역사의 교만한 그 탑은 반드시 무너지고야 만다." "사람은 절대로 먹는 것만으로 살지 못한다. 또 먹는다 해도 혼자나 먹는 것이 먹는 것 아니다. 골고루 먹는 것이 참 먹음이요, 참으로 밥을 바로 먹었을 때 밥은 결코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다. 정신도 함께 자란다." "씨알아, 일어서자! 밤낮 짐승노릇만 하겠느냐? 한번 사람답게 죽어보자!"
선생님은 "모든 이름은 다 깃발이다"라고 했다. 놀라운 레토릭이다.
"민중은 말 때문에, 의견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말이야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이야 무슨 생각을 가졌거나 그것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이 민중의 맘씨다. 말과 생각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고 죽이는 것은 명분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염치없다. 더럽다, 타락이다, 업신여기면서도 그 손에서 얻어먹고 그 행렬에 끼어가지 않나? 말은 지도라 하지만 사실은 따라가는 것이다. 정치가가 민중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민중이 나라를 이끌어간다. 모든 이름은 다 깃발이다. 깃발을 메는 것은 민중이요, 지도자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늘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믿으셨다. 그리고 스스로 퀘이커교도가 되셨다. 그러나 선생님을 기독교의 울타리에 두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분명히 말씀했다.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 선생님의 집필실
지난 1998년 선생님이 계시던 서울 원효로 그 집을 방문한 나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선생님이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계시면서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씨알들과 더불어 씨알의 사상을 펼치던, 선생님이 저 불멸의 저술을 해내신 그 공간이 너무나 작았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Small is Beautiful'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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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선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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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 이 작은 집에서 이렇게 빼어난 저술들을 창출하셨구나! 판자로 지어진, 참으로 작은 이 집이야말로 보존되어야 할 문화유산이다. 그때는 함석헌기념사업회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이 사시던 이 집을 서울시가 사들여 기념물로 만들어 달라고 건의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그곳에 갔을 때 함석헌 선생님의 그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곳에는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님을 알리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참으로 황망하고 허탈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우린 이것밖에 안 되는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가!
몇 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할 때 마키아벨리의 고택을 방문했다. 고택이라고 해봤자 그 후 집이 개축되어 서까래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한 사상가의 역사와 정신이 그것으로나마 살아 전승되고 있다는 표지가 되고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이 거처하시던 그 판잣집의 나뭇조각 하나라도 남겨 놓았다면, 그것이라도 모아서 어디 놔두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생각했다. 콘크리트 블록이나 벽돌이라도 몇 장 보존해 두었다면 이런 안타까움을 덜할 것이다.
한 시대의 사상과 정신, 문화와 전통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함석헌이라는 시대와 역사에 우뚝 서는 사상과 정신의 아이콘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평화운동, 같이살기운동을 주창하고, 남과 북의 통일정신을 일깨운 우리 시대의 스승을, 꽃과 나무와 어린이를 사랑하면서 동서고금을 넘나들던 사상가를,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글을 구현한 시인이자 교육자를, 우리는 함께 만나야 한다.
그리운 함석헌 선생님! 선생님 말씀이 큰 소리로 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