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촉천민 해방의 횃불...암베드카르의 삶
<암베드카르>번역 이명권씨 "그는 인도의 '킹' 인도의 '게바라'" [2005-08-31 10:12]
“선생님은 저에게 조국이 있다고 하십니다만,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 드리건데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저의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1931년 제2차 원탁회의에서 벌인 간디(1869-1948)와 암베드카르(1893-1956)의 논쟁에서 암베드카르가 던진 이 말은 인도 안에 존재하는 계급 차별의 깊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더구나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일한 상징적 인물로 잘 알려진 간디와의 논쟁이라는 점은 더없이 흥미롭다.
‘조국의 독립’만큼이나 절실했던 ‘불가촉천민 해방’. 그 문제가 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인도 안에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암베드카르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암베드카르. 그의 이름은 낯설다. 민족운동가 간디나 인도의 수상 네루 등 “인도를 빛낸” 몇몇 인물들의 이름을 더 거론한다고 해도 암베드카르의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인도에서 암베드카르가 점하고 있는 입지는 실로 놀랍다.
변호사이자 노동문제 전문가, 정치가, 종교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에 힘쓴 혁명가였던 암베드카르. 거리 곳곳에 세워진 동상이 대변하듯, 인도 민중들에게 암베드카르는 가히 혁명적인 영웅이다.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아온 불가촉천민들의 ‘사람됨’을 역설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인도 헌법에 명시했던 성과 하나만으로도 그 상징성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 억압의 근원이 힌두 전통에 있음을 직시,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현대 인도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던 암베드카르.
‘암베드카르’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얼마 전 <암베드카르>(디완 찬드 아히르 지음/ 에피스테메 펴냄)를 번역한 이명권(코리안 아쉬람 대표) 씨는 암베드카르를 가리켜 “인도의 마틴 루터 킹”이나 “인도의 체 게바라”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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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베드카르>를 번역한 이명권 씨 |
인도 민중들의 ‘우상’, 암베드카르
“실제로 인도의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동상들은 암베드카르의 동상입니다. 물론 간디의 동상도 있죠. 하지만 암베드카르의 동상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한 번이라도 인도에 가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인도 민중들에게 암베드카르는 영웅, 그 이상입니다. 불가촉천민들의 집 안에 암베드카르의 사진이 걸려있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지금도 불가촉천민들은 암베드카르에 관한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글썽이죠. 암베드카르에 대한 추앙은 영웅을 넘어 ‘우상’에 가까울 정도에요.”
인도 시내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에게 “암베드카르가 어떤 사람이죠?”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간디는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위대한 분입니다”라고. 이 단적인 예는 인도 내에서 암베드카르가 점하고 있는 입지를 잘 보여준다.
보통 우리가 인도하면 ‘간디’를 떠올리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다. 암베드카르가 그토록 인도 민중들에게 ‘우상’의 입지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했던 선구자적 역할’ 때문이다.
그는 인도의 헌법에 불가촉천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명시했으며, 민중교육협회를 설립,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여러 대학을 설립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최하층민을 위한 의석 및 공직 할당을 법제화하여 정계와 공직에서 불가촉천민들이 일정 비율의 입지를 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가 칭송받는 것은 단지 그런 성과 때문만은 아니다. ‘가재(家財)도구’와 다를 바 없는 불가촉천민들의 존재를 사회, 정치적으로 온전하게 끌어올리는 발화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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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런던에서의 제2차 원탁회의. 여기서 마하트마 간디와(중앙) 암베드카르(앞줄에서 우측으로 네번째) 두 거인은 공개적으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에피스테메> |
불가촉천민을 끌어안지 못하는 간디의 한계
그런 면에서 인도 안에서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암베드카르와 간디의 ‘만남과 갈등’은 매우 흥미롭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함께 대표자로 참석했던 원탁회의에서 드러난 둘의 차이는 그들의 성향을 확인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역자 이명권 씨는 그 둘의 차이는 “카스트제도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치와 교육 등 주요한 위치는 모두 상층 카스트들이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촉 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차단돼 있었어요. 그런데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계급이 자신들의 입장과 현실을 대변할 수 있도록 ‘자치 선거와 행정’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간디는 그것에 대해 결정적으로 반대했어요. 만약 불가촉천민계급이 따로 독립선거를 하게 되고 행정을 하게 되면 인도사회가 분열하게 될 거라고 염려했던 거죠.”
인도가 온전히 독립해야 한다는 ‘당위’가 있긴 했지만 그 둘의 간극은 명확했다. 불가촉천민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에 대해 “저에게는 이 문제가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라는 간디의 발언은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정당한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라고 한 암베드카르와 대조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노력한 인물로 언제나 간디만이 회자됐던 사실-인도의 바깥에서-에 대해 역자는 “간디가 실제 그의 사상보다 많이 미화됐다”고 지적한다.
“사실 간디는 자신의 한계, 불가촉천민에 대한 계급적인 인식을 극복하지는 못했어요. 불가촉천민 가족을 데려와 아쉬람에서 함께 산 적이 있었죠. 그러나 그것은 불가촉천민들의 궁극적인 문제를 정치적 입장에서 해결하려던 게 아닌, 그저 ‘동정’에 머물러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설령 동정은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불가촉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어요.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일컬어 ‘하리잔(신의 아들)’으로 부르며 그들을 대우했지만 불가촉천민들은 이를 거부했어요. 신의 이름으로 핍박받은 불가촉천민들에겐 당연한 행동이었지요.”
이런 간디의 한계는 결국 암베드카르가 영국에게서 얻어낸 결실인 불가촉천민들의 자치선거를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자치선거에 반대해 죽기를 각오한 채 단식투쟁 중인 간디를 암베드카르는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간디와 암베드카르는 ‘푸나협정’을 통해 불가촉천민 비례대표, 즉 관공서와 공직에 일정 비율의 불가촉천민들이 위치하게 되는 결과를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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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월 14일 나구프르에서의 불교 개종의식. 수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암베드카르. 이 날 30만 명의 불가촉천민들이 암베드카르를 따라 불교로 개종했다. <에피스테메> |
현대 인도불교 중흥자인 암베드카르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해방자란 명성, 업적과 함께 ‘현대 인도 불교의 중흥자’로 추앙받는다. 실제로 암베드카르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던 1956년 10월 14일에 30만 명이 넘는 불가촉천민들이 함께 개종하였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힌두교 경전 ‘마누법전’을 불태우기도 했던 그의 과격한 개종은 그저 단순한 ‘개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힌두 문화에 대한 전면적 항거이자 카스트제도에 대한 완전한 거부의 몸짓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암베드카르의 개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한 개종이 아니라 카스트제도에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상징적 항의가 담겨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가 시크교나 기독교, 혹은 그 밖의 종교가 아니라 불교였는가 하는 점도 매우 주목해 봐야 해요. 그것은 그가 ‘신’의 이름으로 억압을 자행해 온 힌두에 대해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사회 혁명을 하는데 근간이 됐던 자유, 평등, 우애라는 사상 역시 불교의 일환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암베드카르에게 종교는 일종의 ‘도덕적’ 준거였다. 그저 신앙심을 돋우기 위한 절대적 존재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이성과 도덕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하고 발전시킨 인도의 불교는 자유와 자비, 평등사상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사회학적 종교라 일컬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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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설하는 암베드카르. <에피스테메> |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과 억압
그러나 그의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 살고 있는 삶의 지반은 백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비록 헌법 15조에 ‘모든 국민은 공공시설의 이용에 있어서 어떠한 이유(종교, 인종, 카스트, 성별, 출생지 등)로든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그저 명시된 것에 불과하다. 역자는 현지 불가촉천민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재 인도에는 보이지 않는 카스트제도가 확고하게 존재합니다. 이미 카스트제도는 폐지됐고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말이죠. 그러니 불가촉천민에 대한 폭력과 차별도 여전하죠.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 곳의 대학교수들 여럿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물론 암베드카르가 세운 불가촉천민 대학의 교수들이죠. 그런데 그 안에서도 불가촉천민 출신교수와 다른 상위 카스트 계급 출신의 교수들은 엄청난 차이를 두고 생활하고 있더군요. 기숙사를 따로 쓰는 것은 물론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요. 소위 사회적 인정을 받는 대학교수들조차 그러니 다른 불가촉천민들은 말할 것도 없는 셈이죠.”
그러면서 인도 불가촉천민들에게 ‘우상화’에 가까운 암베드카르에 대한 추앙은 그런 ‘절박한 현실’로 인해 더욱 절실해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불가촉천민’이라는 이름 아래 차별과 억압의 굴레 속에서 살던 이들에게 희망의 한줄기 빛이 됐던 암베드카르. 그의 열정적인 업적과 투쟁을 접하게 되는 일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척박하기만 한 불가촉천민들의 삶이나 “새로운 계급 차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과거 속에서만 유효한 영웅이 그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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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촉천민 해방운동가 암베드카르
불가촉천민 출신인 암베드카르(1893-1956)는 어릴 적부터 여러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로 건너가 수학했다. 존 듀이의 지도와 영향아래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일명 ‘초다르 저수지 사건’에 앞장선다. 당시 불가촉천민들에게 금지된 ‘초다르 저수지’의 물을 식수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항거했던 이 사건을 계기로 힌두교 경전인 <마누법전>을 불태우는 등 본격적으로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어 그는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연맹을 결성하고 독립 노동당을 창설하는 등 불가촉천민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나갔다. 훗날 수상 네루가 이끄는 내각에 노동문제 담당관으로 초빙된 후 노동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인도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다.
헌법 제 15조에 ‘모든 국민의 평등한 권리’를 명시하고, 불가촉천민의 공공시설 사용권, 일정 비율의 공직 할당, 국회의 지정의원석 확보를 얻어냄으로 불가촉천민의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불가촉천민의 계급화를 정당화하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여 인도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김진아 기자 nebo@coreafoc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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