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영혼

마하트마 간디 - 요게시 차다

문근영 2009. 12. 13. 15:57

마하트마 간디 / 요게시 차다 / 한길사

 


출생과 유년

 

 

1931년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하여 런던에 갔을 때, 작은 소녀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러 다가갔다. 그러나 소녀는 곧 수줍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아이가 사인을 요청한 자그마한 남자는 도티를 입고, 어깨에는 대충 기운 거친 숄을 둘렀다. 안경테는 싸구려 철사줄이었다. 왠지 이상해 보였다. 아이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엄마, 이 사람이 정말 위대한 거예요?”

간디의 위대함, 아니 독특함은 그가 정치에서 이룬 혁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간디는 단순한 정치 이론가나 분석가가 아니었다. 그는 비상한 동정심으로 인류를 사랑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가난한 사람의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사실 간디는 새로운 인간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간디는 인류 역사상 비폭력의 원리를 개인으로부터 사회와 정치의 수준으로 확장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늘 낙관적이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보니 에스파냐계 미국 철학자인 조지 산타야나의 시구가 떠오른다.콜럼버스는 하나의 세계를 발견했으나 해도도 없었다,


다만 믿음으로 하늘을 보고 앞길을 판독해냈을 뿐.
영혼의 흔들림 없는 예감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그의 모든 과학이요 유일한 기술이었다.

아인슈타인 교수는 간디의 75세 생일을 맞이하여 이런 헌사를 바쳤다.
“아마도 뒷세대 사람들은 이런 인물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걸어다녔다는 것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에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포르반다르는 아라비아 해로 툭 튀어나온 카티아와르 반도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포르반다르 토후국(土侯國)의 수도이다. 1872년 통계에 따르면, 포르반다르(면적 1644제곱킬로미터)의 인구는 7만 2천 명이며, 포르반다르 시의 인구는 1만 5천 명이었다.간디 가문은 바이샤 카스트??凰育岵 힌두 카스트 제도의 상인 계급?? 모드 바니아 계층에 속했는데, 원래는 식료품상을 하던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디 가문은 카티아와르에서 꽤 오랫동안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간디의 할아버지, 아버지, 숙부는 차례로 데완, 즉 포르반다르 토후의 총리를 지냈다. 간디의 아버지는 나중에 포르반다르와 비슷한 작은 두 나라의 총리직도 맡았다.

 

이들 가운데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나라는 없었다. 그 결과 영국령 인도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인도의 오랜 관습과 전통이 두드러졌다.영국이 인도에서 직접 통치권을 행사한 것은 1857년 폭동 뒤의 일이다. 그후로 인도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델리의 부왕(副王)이 통치하는 영국령 인도로, 그 모든 주에는 영국 주지사가 있었다. 또 하나의 인도는 550개의 토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토후국들은 단순히 영국의 앞잡이로, 아무런 정치적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영국은 이런 분할 통치 전술을 통하여 인도 아대륙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러시브룩 윌리엄스 교수는 1930년 5월 28일자 런던의 『이브닝 스탠더드』에 기고한 글에서 그 의미를 아주 간결하게 표현했다.

 

현재 인도 전역을 장기판처럼 갈라놓고 있는 이 봉건 국가들은 중요한 안전장치이다. 그것은 분쟁 중인 영토에 우호적 요새들의 방대한 망(網)을 구축해놓은 것과 같다.

 

이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원주민 국가들의 망 때문에 영국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도 인도 전역을 휩쓸기는 어렵다.

 

토후국들은 아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했으며, 인도의 총인구의 4분의 1이 그곳에 살았다. 토후국들은 크기와 재정 규모가 가지각색이었다. 일부 타락한 토후들은 유럽 부자들의 놀이터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반면 어떤 라자(왕-옮긴이)들은 일년에 80파운드 이하의 돈으로 생활했다. 국고의 일부를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는 통치자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자신의 기존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을 통치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다.영국은 토후들에게서 군사력을 박탈했다. 대신 그들의 영토 내에서는 많은 자유를 허용했다. 단 영국 정부의 대리인이나 주재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는데, 그들의 주된 기능은 토후들이 영국의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 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토후들은 델리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인도 정부에서 통과된 법은 그들에게 구속력이 없었다. 토후들은 영국 왕실에 충성을 바쳤다. 그들은 영국의 외교 정책을 인정하고 따르기로 동의했다. 영국은 토후국의 일에 개입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 권리를 행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 꼭두각시 토후들이 정부 대리인이나 주재관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모한다스의 할아버지인 우탐찬드 간디는 포르반다르의 데완의 지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토후국에서는 정치적 음모가 일상사였다.

토후국의 통치자들은 백성에게는 전제군주처럼 행동했으나, 영국인들에게는 철저하게 아부했다. 우탐찬드 간디는 섭정 왕후 루팔리 바의 시녀 문제를 둘러싼 국내 분쟁에서 왕후의 반대편에 섰다가 눈밖에 난 적이 있었다. 루팔리 바는 왕실 근위대를 보내 우탐찬드의 집??戮 아버지 하리지반이 산 집이었다 포위하고 대포를 쏘았다. 우탐찬드는 포르반다르의 총리직을 내놓고 옆의 주나가르 토후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우탐찬드는 주나가르의 토후에게 인사를 할 때 왼손으로 경례를 했다. 이유를 묻자 우탐찬드는 설명했다.

“오른손은 이미 포르반다르에게 바쳤습니다.”

모한다스는 할아버지의 이런 충성심을 자랑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원칙적인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1841년에 루팔리 바가 죽고, 그녀의 열여덟 살 된 아들 비크마트지가 포르반다르의 왕위를 계승했다. 비크마트지는 우탐찬드에게 다시 데완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우탐찬드는 포르반다르로 돌아왔으나, 데완 자리에는 가장 재능이 많은 다섯번째 아들 카람찬드(간디의 아버지)를 추천했다. 카람찬드는 1847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포르반다르의 데완이 되어, 28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카람찬드는 열네 살에 결혼을 하고, 스물다섯 살에 재혼을 했다. 그는 각각의 결혼에서 딸을 하나씩 두었다.

 

그러나 두 부인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며, 두 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세번째 결혼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세번째 부인은 불치병에 걸려 평생 고생한 것으로 보인다. 카람찬드는 세번째 부인의 허락을 얻어??퓜グ 아니라 예의를 차린 것일 뿐이었다??括括 있는 상태에서 다시 결혼을 했다.땅딸막하고 어깨가 넓은 사십줄의 카람찬드는 아직 십대를 벗어나지 못한 푸틀리바이와 결혼했다. 푸틀리바이는 자식 넷을 낳았다. 첫째는 딸 랄리아트벤이다. 그녀는 1862년에 태어나서 거의 백 년 뒤에 죽었다. 이듬해에 장남 락스미다스가 태어났다. 차남 카르산다스는 1866년에 태어났으며, 막내 모한다스 카람찬드는 1869년에 태어났다.

카람찬드, 푸틀리바이 부부와 자녀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집에서 살았다. 이 집은 오랜 세월에 걸쳐 3층짜리 건물로 개축되었다. 이 집이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매매 및 이전 문서를 보면 1777년 마하트마의 증조 할아버지 하리지반 간디가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은 두 개의 사원 사이에 끼여 있었는데, 일반 가정집이라기보다는 작은 요새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마당 주위에 비좁고 어둡고 음침한 방들이 벌집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꼭대기층에 있는 방들만 햇빛이 들어오고 바람도 잘 통했다. 카람찬드와 그의 가족은 일층의 베란다로 통하는 방 두 개를 차지했다. 나머지 방들은 카람찬드의 네 형제의 처자식들이 사용했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는 그의 씨족을 사랑했다. 또 진실하고, 용감하고, 관대했다. 그러나 성질이 급했다. 또 육체의 쾌락에 약간 빠지기도 했다. 마흔이 넘어서 네번째 결혼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청렴결백했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엄격한 공명정대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유명했다. 아버지는 재산을 모으겠다는 야심이 전혀 없었다. 우리에게도 유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경험에 의한 교육 외에는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았다. 기껏해야 5학년 정도 수준의 독서를 했을 것이다.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라의 실무에 대한 풍부한 경험은 아주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을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카람찬드는 포르반다르의 총리로 오랜 세월 재직한 뒤에도, 라지코트 토후국과 완카너 토후국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비슷한 자리를 맡았다. 한번은 영국인 주재관이 라지코트의 원주민 통치자인 타코레 사헤브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했다. 그러자 카람찬드는 열렬하게 주군을 옹호했다. 주재관은 총리의 태도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사과하라고 요구했으나, 카람찬드는 당당하게 거부했다. 주재관은 카람찬드가 사과할 때까지 나무 밑에 붙들어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도 카람찬드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주재관은 석방을 명령하고 말았다.카람찬드는 신앙심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종교적 행동은 주로 사원을 자주 찾는 것과 종교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브라만 출신의 한 친구의 권유로, 매일 예배 때 『바가바드 기타』의 몇 구절을 큰 소리로 암송하곤 했다.그러나 푸틀리바이에게는 종교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나 아는 것이 많았다. 또한 신앙심이 깊었으며, 기도와 금식에 중독이 되다시피 했다. 그녀에게는 매일매일이 거룩한 날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이행했으나, 사실 그녀의 정신은 다른 데 가 있었다. 마치 저세상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사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타고난 금욕주의자로서, 규율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해마다 차투르마스 그대로는 ‘넉 달의 기간’이란 뜻이며, 우기 동안 계속되는 일종의 사순절 돌아오면 그녀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다.

푸틀리바이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어느 해에는 하루 걸러씩 완전히 단식을 했다.그 다음 차투르마스에는 해가 나올 때까지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녀는 점점 여위고 초췌해졌다. 자녀들은 그녀의 마른 몸을 보고 구름에 틈이 생기지 않나 살피다가 해가 비치기라도 하면 동시에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푸틀리바이는 자신이 직접 해를 봐야 음식을 먹겠다고 서약을 했다.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오면, 해는 이미 구름 뒤로 사라져 보이지 않곤 했다. 물론 푸틀리바이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명랑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안심시켰다.“상관없다. 오늘은 신이 내가 먹는 것을 바라시지 않나 보다.”

그러고 나서 총리 부인은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아가 집안일을 했다. 간디는 이렇게 썼다.

“어머니가 내 기억에 남기신 가장 강한 인상은 그 성자 같은 모습이었다.”

간디는 아버지에게서 고집스러움, 청렴결백한 태도, 실용적 감각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신앙심, 헌신성, 금욕주의를 물려받았다. 그는 비슈누교와 자이나교의 영향 아래서 살았다. 두 종교 모두 모든 생명을 신의 창조물로 보고 신성시했다. 그는 매일 농작물을 해치는 야생동물도 죽이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자랐다. 온갖 종파의 성자와 현자가 그의 집을 찾았다. 간디는 이렇게 썼다.

“자이나교 수도승들 역시 아버지를 자주 찾아와 자이나교도가 아닌 우리에게서 먹을 것을 받아가기도 했다. 그들은 아버지와 종교적인 일이나 세속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카람찬드에게는 이슬람교도와 파시교도(이슬람의 박해로 8세기에 인도로 피신한 조로아스터교도의 자손-옮긴이)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신앙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했으며, 카람찬드는 그들의 이야기에 정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초등학생 모한다스는 아버지의 간호사로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종교를 ‘잠깐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이 많은 것들이 합쳐져서 나는 모든 신앙에 관용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 무렵에 라마 신의 열렬한 신자인 라다 마하라지가 카람찬드 앞에서 『라마야나』의 사도인 라마의 삶을 중심으로 한 고대 힌두의 서사시?? 나오는 이행시나 사행시를 암송했다. 라다 마하라지는 그런 시를 노래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기도 했다. 열세 살의 모한다스는 그 이야기에 도취했다.“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나는 『라마야나』에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툴시다스의 『라마야나』를 모든 종교 서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책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