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영혼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

문근영 2009. 12. 4. 13:48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 : 1869 ~ 1948



1869∼1948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사상가. ‘마하트마(위대한 혼, 큰 성인)’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어머니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종교를 믿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런 가정 환경 속에서 그는 아힘샤(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와 채식주의, 자기 정화의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며 자랐다.

 

어려서는 인도에서 교육받았으나 1887년 런던에 있는 이너템플 대학에 입학하였다. 학업에 열중하였으나 영국 체류 3년 동안의 생활은 그의 인격과 정치 사상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91년 변호사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893년 소송 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 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 때에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진실에의 헌신)가 생겨났다. 이는 적대자들에게 원한과 투쟁,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해 그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새로운 방법이다. 이후 사태가 보여 주듯 그는 아프리카의 인도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감춰진 특별한 능력을 찾아 냈으며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1915년에 모국에 돌아온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정치 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민중 탄압법인 롤라트 법이 제정되자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투지를 갖고 일어나 1920년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인도 국민 회의를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 기구로 바꿔 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중 조직을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영국 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으로 인도 민중이 갖고 있던 외국 지배자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국민 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으로 농촌 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 대회에서 국민 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총독과 협상하여 반영(反英) 불복종 운동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 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 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1934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 자리를 사임하고, 세바그람에 가서 살면서 농민을 교육하고, 하층민을 위해 투쟁하며, 교육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에 인도 국민 회의는 자치 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 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이 끝난 후 국민 회의파, 이슬람 동맹, 영국 정부 간의 3자 협상이 벌어졌으나 협상 중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1947년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결정되었고, 양쪽으로부터의 비난을 무릅쓰고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간디는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에 의해 1947년 9월 캘커타의 폭동이 가라앉았고, 1948년 1월에는 델리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라는 반(反)이슬람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인도인 가운데서도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간디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간디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많은 남녀 노소 그리고 서구의 많은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종파로부터 애정과 충성을 받았다. 그는 분명히 정치 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주된 동인(動因)은 종교였으며 평생 평등과 비폭력의 사상을 일관되게 지켰다.

 

간디의 저서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표현되어 있는 서구의 물질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근대 국가에 대한 불신, 폭력에 대한 전면 거부는 기술 문명의 폐해와 평화의 위협으로 가득찬 현대 세계에서 점차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