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영혼

[책소개] 간디와 맞선, 간디에 가린 인도 천민의 아버지 ‘암베드카르’

문근영 2009. 12. 4. 14:48

간디와 맞선, 간디에 가린 인도 천민의 아버지 ‘암베드카르’

 

 

 

임종업 기자
 
인도의 암베드카르를 아는가? 모른대도 부끄러워 마시라. 그 나라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까닭이다.

 

 

<암베드카르 평전>(게일 옴베트 지음, 필맥 펴냄)과 <암베드카르>(디완 챤드 아히르 지음, 에피스테메 펴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암베드카르를 마하트마 간디와 비교하여 서술한다는 점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간디는 알아도 암베드카르는 낯선 탓이다. 잘 알려진 간디를 고리로 이야기를 풀면 알아듣기 쉽지 않겠는가. 기실 암베드카르는 간디와 22살 차이로 동시대를 살아 사사건건 부닥쳤다. 부닥침이 거의 정면대결 수준이라면 간디와 더불어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간디와의 정면대결이라니? 독립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지냈으니 적어도 그 인물이 영국의 끄나풀이 아닌 것쯤은 추측이 가능할 터이다.


 

추종자와 함께 불교로 개종

 

 

한두 마디로 줄여보자. 천출. 이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그는 불가촉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해 수차례 군중집회를 주도한다. 독립인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불가촉천민을 둘러싸고 간디와 대립한다. 고단한 투쟁 끝에 독립인도의 헌법에 여성과 불가촉천민의 자유와 권익 보호를 위한 조문을 명문화하는데 성공한다. 나아가 힌두교로는 카스트제도를 깨뜨릴 수 없음을 절감하고 추종자 50만명과 함께 불교로 개종해 결과적으로 인도불교의 중흥자로도 꼽힌다.

 

 

자! 이제, 간디와 대비하면서 암베드카르에 빠져보자.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독립인도의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2차 원탁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31년 8월.

 

 

이때 암베드카르가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얻어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조국이라고 부르겠는가”라고 따지자 간디는 “불가촉천민들이 힌두교에서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나가는 일이 었어서는 결코 안된다.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메울 수 없는 간극. 태생도 밟아온 길도 다르니 당연할 수밖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간디는 대학에 들어갔으나 공부가 힘에 부쳐 자퇴하고 영국에 건너가 변호사자격증을 땄다. 귀국해서 봄베이에서 별볼일 없는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893년 남아프리카 인도인 사업가의 사건청탁을 맡으면서 남아프리카에서 20년여년을 산다. 1915년 그가 귀국할 무렵 암베드카르는 뉴욕 콜럼비아대학교에서 공부 중이었다. 암베드카르는 23년 귀국해 사회운동 일선에 뛰어든다.

 

 

권리를 구걸하지 말고 투쟁하라

 

 

그동안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던 간디가 불가촉천민을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1932년 불가피한 상황에 밀리기 전까지는. 남아프리카에서 돌아온 간디가 세운 아쉬람에 한 불가촉천민 가족이 들어와 살기를 원하면서 빚어진 사건이 간디의 전기 가운데 1922년까지 불가촉천민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건이다. 이때 그의 부인은 “부엌에서 불가촉 여편네의 꼬라지를 나더러 어떻게 보라고 하느냐”고 앙탈을 부렸다나. 또 간디가 1915~32 여섯 차례 단식을 하면서 ‘불가촉’이란 주박을 풀기 위해 한 것은 한차례도 없었다. 그는 다만 정통파 힌두교인들에게 불가촉천민을 사랑과 긍휼로 대하라고 권면했을 뿐.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받고 물마실 권리조차 없는 불가촉천민 출신
암베드카르는 독립 인도의 건설 과정에서 간디와 정면충돌한다

고단한 투쟁끝에 그는 여성 · 천민의
자유와 권익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반해 암베드카르는 “억압받는 민중의 권리를 회복하려면 억압하는 자들에게 구걸하거나 그들의 양심에 호소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줄기찬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927년 3월 물도 마음대로 떠먹을 수 없는 불가촉천민 1만여명을 이끌고 마하드에서 상수원인 초다르 저수지까지 행진했다.

 

 

그 저수지에서 떼거리로 물을 떠마심으로써 물 마실 권리를 온천하에 알렸다. 그해 말에는 수천명이 다시 모인 자리에서 카스트계급들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힌두법전인 마누법전을 불태우는 과단성을 보였다. 1930년에는 나시크에서 칼라람사원 출입할 권리를 따내려 떼거리로 모여 투쟁했다. 결국 폭력사태까지 발생하고 마는데 온갖 어려움 속에서 간헐적으로 5년 동안 지속했다.

 

 

힌두법전을 불태우다

 

 

간디와 암베드카르가 정면충돌한 것은 1932년 2차 원탁회의. 의회대표로 참석한 간디는 첫 연설에서 불가촉천민들에게 독자적인 정치적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암베드카르의 요구를 맹비난했다. 두 지도자는 두달 이상 싸웠으나 간극을 메울 수 없어 영국수상의 중재령이 내려졌다. 그 과정에서 간디는 영국의 인도담당 장관에게 수차 편지를 보내 그들에게 대표권을 따로 주었을 때의 폐해를 경고했다. 자신의 희망사항이 물거품이 되자 간디는 너죽고 나죽자식으로 단식에 들어갔고 엿새만에 힌두교쪽에 주어진 의석 가운데 일정의석만 그들에게 배정하는 협정(푸나협정)이 맺어졌다. 간디가 비로소 불가촉천민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게 된 계기다.

 

 

그 후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들이 입법부만이 아니라 행정부에 진출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1937년 크하레 내각은 불가촉 천민 1명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했다. 간디? 물론 반대했다. 구조적인 가난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를 잃었으므로 그들에게 일정수의 공직을 떼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면 간디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인도인들은 “암베드카르가 불가촉천민의 어머니라면 간디는 보모에 불과하다”며 “그가 없었다면 인도 불가촉천민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제 알겠는가. 암베드카르를 간디와 비교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기분나쁜 아이러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