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제04회]가난한 삶

문근영 2009. 11. 6. 11:52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제04회]


가난한 삶


아기 예수의 탄생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볼 기회입니다. 탄생은 한 생명의 시작일 뿐 아니라,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남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들 곁에 계셨던 그 분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임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온갖 시련과 고통, 그리고 갈등과 분열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 뿌려서 거두고 있는 분수 밖의 욕심, 바로 그 열매입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움터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본래 무일물本來無一物, 마음의 문이 열려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립니다. 오늘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께 비옵니다. 마음 속 깊이 좌절의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오만해지기 쉬운 이들이 겸손과 포용의 덕을 지니도록 깨우쳐 주소서. 그리고 이 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아멘. (성탄 메시지 중에서)


나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자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을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길상사 개원 법문에서)


신앙 생활은 끝없는 복습이다. 신앙 생활에는 예습이 없다.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다. 영적인 체험은 복습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종교적인 체험이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복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어제의 정진은 어제로서 끝나고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한다. 사바세계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산스크리트에서 온 것으로, 우리말로 하자면 참고 견뎌 나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참는 땅'이라는 것이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삶의 묘미는 사라진다.

이 몸이라는 것은 물 불 공기 흙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 또 인간의 존재는 반야심경에 나오듯 오온五蘊, 곧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합쳐져 만들어진 유기적 존재이다.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인연이 닿아 이런 형상을 갖추고 나온 것이다. 또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 자체가 무상한 것이다. 늘 변하는 것이다.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를 오랜만에 본 신도나 스님들은 '아이구, 스님두 이제 많이 늙으셨네요' 한다. 중이라고 안 늙는 재간이 있겠는가. 부처도 생로병사라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우주의 질서이다. 그러나 영혼에는 생로병사가 없다. 거죽은 생로병사가 있다지만 거죽 속의 알맹이는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으며, 병듦도 없고 죽음도 없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은 말하고 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병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말고 그 병의 의미를 터득하라는 말이다. 몸이 건강했을 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병을 앓을 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인간 관계는 어떠했는가. 나는 얼마나 충만되게 살아왔는가. 스스로 자기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병 자체가 죽을 병이 아니라면 그 병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떠야 한다. 좋은 약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의 몸은 허망한 유기체이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있지만 이 다음 순간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다.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 가지고 늘 건강하기를 바라지 말라고 보왕삼매론은 일깨우고 있다. 이 말은 즉 건강했을 때, 내게 건강이 주어졌을 때 잘 살라는 뜻이다. 허송 세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을 무가치한 곳에 쏟아 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허약한가. 옛날 농사짓고 살던, 흙을 딛고 살던 시절에는 흙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흙의 교훈을 몸소 익힐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허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으며 여러 편리한 시설 속에 살고 있는데 체력과 의지는 자꾸 떨어진다. 그것은 흙으로부터 자꾸 멀어지기 때문이다. 대지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허약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지식이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둘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선지식이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언짢으면 언짢은 대로 우리의 삶에 교훈을 주고 있다. 좋은 일은 본받고, 언짢은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고해라고 하지 않는가.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세계가 바로 그 뜻이다. 우리가 이 고해의 세상,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바랄 수는 없다. 어려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집안을 놓고 보더라도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삶에 곤란이 없으면 자만심이 넘치게 된다. 잘난 체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된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왕삼매론은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일깨우고 있다. 또한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삶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안 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런 불행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그 인생이다. 따라서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달아나서는 안 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창의력을, 의지력을 키우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고 했다. 장애가 없는 건 어디에도 없다. 한평생 세상을 살다보면 무수한 장애물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자리에 오면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왔는가. 그러므로 인생이란 일종의 장애물 경주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경주이다. 해탈이란 무엇인가. 그런 장애물을 넘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진 상태,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상태, 이것을 해탈이라 부른다. 장애라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디딤돌이다. 발판이다. 그런 장애가 없으면 해탈도 있을 수가 없다.

장애 없길 바라서는 안 된다. 장애는 해탈의 길로 이어진 길목이다. 그러므로 장애를 거부하지 말고 그걸 받아들이라고 옛 성인은 말하고 있다. 장애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다.

또 성인이 말씀하기를 '작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고 하셨다.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행복의 비결은 결코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가. 모두가 입만 열면 경제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경제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그런 일에만 치우치고 있다. 오늘날 경제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일찍이 우리가 큰 그릇은 만들어 놓지 않고 자꾸 욕심껏 담기만 하려고 한 결과이다. 이 불황은 우리들 마음이 그만큼 빈약하다는 증거이다. 그릇을 키우려면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지 말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개체를 넘어서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소욕지족少慾知足,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넉넉해진다.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꽃이 있다.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옛 성인이 말했듯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낼 수가 없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어 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바세계,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바란다. 극락도 지옥도 아닌 사바세계, 참고 견딜만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어떤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전체로 생각해선 안 된다.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 전 생애의 과정에 볼 때 그것은 통과해야 할 하나의 관문이다. 한 생애를 두고 그런 관문이 한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몇 고비가 있다. 그런 관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정신적인 연륜이 쌓여 가는 것이다. 육체적인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려운 관문을 거칠 때마다 정신적인 나이가 쌓여 간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눈이 열린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진다.


눈앞의 일만 갖고 너무 이해 관계를 따져선 안 된다.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해서 늘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큰 데 있지 않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조그만 데 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자작나무의 잎에도 행복은 깃들어 있고, 벼랑 위에 피어 있는 한 무더기 진달래 꽃을 통해서도 하루의 일용할 정신적인 양식을 얻을 수 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 행복의 씨앗이 들어 있다. 빈 마음으로 그걸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크고 많은 것에 정신 파느라고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잘 살려고만 했기 때문에 작은 것을 갖고는 만족할 줄 몰랐다. 무엇을 갖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가진 대로, 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가진 대로 만족할 줄 모른다.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지극히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령 극락이나 천상에 있을지라도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겉으론 가난한 듯하지만 안으론 부유하다. 왜냐하면 자기 현실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상황 속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만족할 줄 알고 어떤 사람들은 늘 불만을 갖는다. 만족할 줄 알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게 긍정적으로 일이 풀린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고 거기서 다시 뭔가를 하려고 하면 자기 앞에 돌아온 몫까지도 걷어차 버린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로써 만족해야지 둘을 가지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건 허욕이다. 하나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그 하나 속에 있다. 둘을 얻게 되면 행복이 희석되어서 그 하나마저도 잃는다. 흔히 이렇게 말하면 그러다 언제 잘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런 어려운 시대에는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

차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기를 많이 사용한다. 몇 해 전에 중국 대만에서 유학하는 스님이 내가 작은 것을 좋아하는 줄 알고 조그마한 다기를 하나 사왔다. '선禪'이라고 음각이 되어있는, 아주 작고 깜찍한 물건이었다. 다기는 크면 안 좋다. 손 안에 들어와야 한다. 나는 그것을 아주 좋아하면서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많이 사용했다. 그 뒤에 내가 인도로 일본으로 다니다가 대만에 갔더니 육교 밑에서 잔뜩 놓고 팔고 있었다. 그래서 선물하려고 몇 개 사고 다시 내 몫으로 부처 '불佛'자를 쓴 걸 구했다. 그걸 가져와 내 거처에서 쓰는데 처음 하나 가졌을 때의 그 소중함, 그 살뜰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니까 그 마음이 다시 회복되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악 중에서도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은 없고, 재앙 중에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으며, 허물 중에서도 욕망을 다 채우려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죄악이라는 게 무엇인가? 분수에 지나친 욕망인 탐욕에서 온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탐욕이 생사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탐욕은 자기 분수 밖의 욕심이다.
노자는 뒤이어 말한다.
'따라서 넉넉할 줄 알면 항상 풍족하다.'
결국은 만족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갖지 않던 인간 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잇는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법계가 청정해진다는 교훈이 있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면 수천 수만 송이의 꽃이 피어난다는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추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집안에서 그 집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자식, 한 사람의 마음이 지극히 청정하면 메아리가 되어 모든 식구가 변화한다. 그러나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해 보라. 그냥 아버지한테 불안이 전달되고, 바로 자식들에게도 옮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 가지에 이상이 생기면 나무 전체에 이상이 생긴다.

- 법정의 오두막 편지 중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