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제05회]
지혜로운 삶의 선택
자연은 모두 생명의 원천이고 사람이 기댈 영원한 품이다. 또 자연은 잘못된 현대 문명의 유일한 해독제이다. 하늘과 구름, 별과 이슬과 바람, 흙과 강물, 햇살과 바다, 나무와 짐승과 새들, 길섶에 피어 있는 하잘 것 없는 풀꽃이라도 그것은 우주적인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건성으로 보지말고 유심히 바라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신비성과 아름다움을 캐낼 수가 있다.
모든 것이 다 필요한 존재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필요한 것이다. 어떤 생물이 됐든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농약으로, 강한 살충제로 죽여 보라. 그 생물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진다. 오늘 이 생태계의 이변과 환경 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것이 다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 자체가 인간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털어 내고 재채기도 하느라고 지구는 지진도 일으켰다가 또 사방에 불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구 표면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것처럼 하도 귀찮게 구니까 털어 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무엇인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생명의 바탕이다. 우리만 살고 지나갈 생명의 장소가 아니다. 영원히 존속되어야 할 생명의 터전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우리가 너무도 지구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써 지금과 같은 여러 재난과 이변이 오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인간인 내 자신이 우울하고 착잡해진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게 어디 있는가.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조상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고 주저없이 당신네 후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흔히 우리가 짐승만도 못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다. 짐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지금 이렇게 타락하고 있지 않은가. 새삼스레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흙을 가까이 하고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하고 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젼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그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사람답게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각성,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각성을 통해서 비로소 마음이 열린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이미 열려져 있는 세상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파도 위에서 겉도는 것에 불과하다. 마음이 열려야만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음이 열려야만 평온과 안정을 이룰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모든 것은 세월의 풍상에 씻겨 시들고 허물어져 간다. 거죽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 용어로는 '무상하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덧없다. 항상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 늘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만일 이 세상이 잔뜩 굳어 있어서 변함이 없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환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고, 오만한 사람이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면이 밝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변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의 중심을 들여다봐야 한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 살지 않고 중심에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원초적인 물음을 통해서 늘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이 또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이웃은 나와 무관한, 전혀 인연이 없는 타인이 아니다. 그들은 내 분신이다. 또 하나의 몸이다. 왜냐하면 한 뿌리에서, 생명의 커다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가 바로 이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은 그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이웃이란 또 다른 가지이다. 나눠 가짐으로써 내 인간의 영역이 그만큼 확산된다. 열린 눈으로 사물을 대해야 한다. 모든 일을 공들여 뿌려서 거두는 것이지 거저 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내가 뿌려서 내가 거두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이다. 이런 우주의 질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며칠 전에 겪은 일이다. 나는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일에 서툴다. 채마밭이 있어서 이것저것 심었는데 밖에 나들이 갔다 돌아왔더니 봄에 뿌린 씨앗들이 다들 시원치가 않고 고추와 케일과 해바라기, 이 세 가지만 아주 건강하게 자라 있었다. 묵은 밭이라 풀매기도 번거롭고 해서 암스텔담 갔을 때 고흐 미술관에서 구해온 해바라기 씨앗을 그곳에 뿌려 놓았었다. 그래서 요즘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어서 풍경이 볼 만하게 되었다. 고추는 처음 장에서 모종을 갖다 심었는데 갑자기 냉해가 닥쳐 얼어죽었다. 내가 사는 곳이 해발 한 8백 미터쯤 되는 곳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다시 스무 포기 정도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며칠 전 고추를 따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내가 고추를 돌본 것은 단지 모종을 두 번 심어 주었고 풀 조금 매주었고, 지난 여름 몹시 가물었을 때 장에서 비닐 호스를 사다가 물 준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른 체했는데 고추밭에 가보니까 고추가 그토록 많이 열려 있었다. 스무 포기에서 한 자루가 넘는 고추를 따냈다. 그래서 고추 보기가 참 부끄러웠다. 전혀 손질도 안 해주고 모른 체 했는데, 단지 내가 해준 거라곤 가뭄에 물 좀 주었고 김 좀 매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다. 이것이 흙의 은혜다. 또 생명의 신비이다. 농경사회에선 이런 일들을 수시로 경험했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와 도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에 가서 편리하게 사다 먹으니까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순리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크고 많은 것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까 늘 갈증 상태에 놓여 있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그 물건에 의해 내가 가짐을 당하는 것이다.
- 법정의 오두막 편지 중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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