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탐방

시인 장석주

문근영 2009. 11. 4. 19:32

크고 헐렁한 바지

장석주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참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옷은 곧 못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지를 버거워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소리나게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바지의 독재에 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언제까지나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시부문 신인상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가작
고려원 편집장 역임, 청하 편집발행인 역임
현재 동덕여대 등에서 강의
시집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그리운 나라>
<어둠에 비친다>,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등
평론집 <풍경의 탄생>, <들뢰즈, 카프카,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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