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탐방

시인 정현종

문근영 2009. 10. 27. 14:54

[원재훈 시인의 작가 열전]
‘詩 완벽주의자’ 정현종
“시인은 자기 삶 견디며 남의 삶 견디게 하는 존재”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내면의 은신처에서 절제된 편안함을 즐기는 정현종 시인. 형형한 눈동자와 백발의 노시인은 하얀 호랑이, 정신 깊은 사찰 초입에 서 있는 사천왕상을 닮았다. 그가 일군 이력은 바위덩어리처럼 묵직하지만 시 한 편 한 편은 날개를 달고 있어 가볍게 우리에게 날아온다.
 
 

내겐 수십 년을 형제처럼 지낸 친구가 있다. 참 소중한 인연이다. 간혹 만나 별말을 나누지 않아도 영감을 얻고, 사소한 일상을 얘기해도 별을 보고 오는 기분이 드는 그런 친구다.

그 친구 역시 수십 년을 형제처럼 지내온 선배가 있었다. 그는 내 친구 인생의 멘토였고 직장 상사였으며 어려운 시절 1년 남짓 자신의 집에서 머물게 해줬으니, 친구에게는 그 선배가 가족과 같았다. 바로 그 선배가 암 투병을 할 때 친구는 매주 토요일 오후면 선배를 찾았다. 내 기억에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친구와 놀고 싶어 나와 있자고 했다. 그런데 친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배에게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가끔 안 갈 수도 있지,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이유가 뭐냐고. 친구는 말했다.

“내가 오갈 데 없을 때, 1년 넘도록 매일 저녁밥을 집에서 먹여준 선배다.”

춥고 헐벗은 시절에 선배의 식구들과 저녁밥을 같이 먹었다, 라는 말은 시다. 그 말의 울림에서 나는 잠시 벗어나지 못했다. 선배와 그의 아름다운 부인, 그리고 자식들까지.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 후로도 친구는 어김없이 토요일 오후면 그 선배를 찾아갔다. 가서 그동안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과 세상 이야기를 전했고, 간혹 산책도 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며칠 전에 친구의 그 선배가 작고했다. 친구는 사흘 내내 상가를 지키느라 몸이 지쳤고, 마음은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낙담한 친구를 위해 명동 지하상가 레코드 가게에서 LP판을 사주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뜨거운 칼국수를 같이 먹었다. 그리고 소공동 지하상가에서 시청을 거쳐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그 친구는 직장으로, 나는 내 갈 길로 갔다.

그리고 정현종(鄭玄宗·69) 선생을 만났다. 한 달 전 통화할 때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전날에 선생이 그냥 당신이 대학 퇴임 후 연구실로 쓰는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로 오라고 하셨다. 그냥 편하게 몇 마디 나누면 되리라. 선생을 찾아가는 강변북로는 출근시간이 지나선지 한가했고, 초행길이었지만 동부이촌동을 조금 아는 터라 가는 길이 편했다. 가는 도중에 왜 나는 선배를 잃은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고, 선생의 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를 중얼거렸을까. 모를 일이다. 무슨 상관이 있다고.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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