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억새 또는 하얀 면도칼 -우당 김지향

문근영 2009. 6. 16. 21:01
억새 또는 하얀 면도칼 -우당 김지향

억새 또는 하얀 면도칼
김지향


억새는 머리칼로 허공을 면도질 한다
울퉁불퉁 등 굽은 허공을 가지런히 깎고 나서
허공 아래 웅크린 사람의 검은 욕망도 깎아낸다

달려오는 바람의 안테나에 붙들리지 않는 날은
구부린 허리 밑 가슴을 닫아건 호수의 비밀을 훔쳐내
출렁이는 슬픔으로 온 몸을 씻는다

억년을 씻고 또 씻어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가슴의 억새
하늘에다 가슴 문 열어놓고 호수의 슬픔을 송신하려지만
바람은 갈고리를 쏘아 억새의 머리채를
땅으로 끌어 내린다

억새는 달린다 날마다 달린다
바람을 피해 하늘 밖을 달린다
수북하게 자동판매기가 열린 우주
가득히 풀어 놓은 머리칼로
우주의 영양분을 몽땅 들이마신다

사람들은 억새 곁을 지나면서
호수한테 물려받은 슬픔을 또 물려받지만
억새는 사람의 생각을 모두 열어보고
꽁꽁 깊이 묶어 놓은 생각 하나하나 줄을 그으며
풀어 헤쳐 나간다

(넓은 치맛자락으로는
죄 없이 쫓기는 이들을 숨겨주기도
예리한 이빨의 면도칼로는
죄 지은 이들의 죄 붙은 손가락을
잘라내기도 하는)

하얀 가슴의 억새,
또는 은빛의 면도칼

 

 

출처, 시사랑사람들 문학 우당선생님의  자서기고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깊은 강 / 이성선  (0) 2009.06.22
[ 6월의 시] 밤비 -김명인   (0) 2009.06.19
선운사 동구 / 서정주   (0) 2009.06.03
바닷가에서 / 오세영   (0) 2009.06.03
유월이 오면/김사랑  (0) 2009.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