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 남(언론인)
경제학자들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경제적 양극화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만, 나는 경제적 양극화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 정치적· 이념적 양극화 문제라고 본다. 경제적 양극화는 분명 정책적 과제이기는 하지만, 국민내부의 분열과 적대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큰 나라'에서 '따뜻한 나라'로의 정책적 지향을 통하여 완화 또는 개선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이념적 양극화는 그 안에 증오와 적대를 품고 있어 국민내부의 분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스러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들어 우리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대립은 해방직후의 그것을 방불케 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경술국치 100년을 앞둔 우리의 참회
얼마 전 보수계열의 한 민간단체에서「친북 반국가 인명사전」을 펴낸다면서 일차적으로 1백 명의 명단을 발표했다고 한다. 일일이 그 명단을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보도된 바에 따르면 현역 국회의원 3명을 비롯한 정치인 14명과 재야인사 36명, 학계인사 17명, 문화예술언론계 13명, 법조계 3명, 의료계 2명, 해외인사 5명이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웬 1950년대식 매카시 선풍인가 싶다. 그 단체가 말하는 선정근거는 ‘과거 인터뷰나 논문 등을 통해 북한당국의 노선을 찬양하거나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하는 인사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매카시적 수법으로 비겁하게 명단을 발표하는 수법이 아니라, 차라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하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있지 않은가.
「친북인명사전」은 그 발상에서부터가 최근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된「친일인명사전」에 대응한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친일인명사전」의 대항마로 「친북인명사전」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친일의 대칭은 결코 친북일 수가 없다. 「친일인명사전」은 199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대학교수 1만인 선언'이 그 바탕이 되어,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민족 공동체 전체의 참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출판된 범국민적, 역사적 작업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거기에는 일제 36년 동안의 민족적 자성(自省)이 담겨있으며,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대의명분이 있다, 굳이 진실을 밝히는 이유도 누구를 미워하고 배척하기 위함이 아니라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함이었다.
책의 서문에서 부친의 부끄러운 과거를 먼저 고백했던「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은 '억압과 수탈은 그것을 당한 쪽에게는 물론, 그 일을 저지른 쪽에게도 더할 수 없는 치욕'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제 36년 동안의 그 치욕을 씻어내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내가 알기로 1990년대에 일본총독부건물 및 총독관저를 철거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번「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이 전부가 아닌가 싶다. 또한 이 책은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우경화에 반대하고 과거사 반성을 촉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나마 우리가 갖출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의 현대정치사는 민족,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하나의 축과 친일, 반민주, 반통일을 지향하는 또다른 축과의 대립과 각축으로 점철되어왔다. 1948년 9월에 발족된 반민특위가 1949년 9월, 이승만정권에 의해 해체되면서 대한민국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실패로 끝났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친일파 중 상당수는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해 자신의 친일행각을 덮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반공에서 찾은 역대 독재정권과 결합하여 이 나라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분열과 적대는 이제 그만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이들이「친일인명사전」에 맞서 「친북인명사전」을 발간코자 하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반민족 친일, 반민주 독재의 편에 서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친북인명사전」에 올리겠다는 인사의 선정기준을 비롯한 일련의 행태와 수법이 군사독재 아래서의 공안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자의적으로 대상인물을 선정해 놓고, 억울하면 이의신청하라는 것이다. 당하는 처지에서 보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 다. 그것은 백주의 테러요, 어느날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자객수법의 전형이다. 지난날 군사정치문화가 그랬다. 그들은 민주인사들을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사회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로 인한 열등감과 좌절감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상투적인 대사로 법정에 세웠다. 억울하면 무죄는 네가 입증해 가라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정상화'되기는커녕 비정상의 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분열과 적대가 일상화되는 사회로 갈 것이 뻔하다. 대통령직속의 사회통합위원회의 위원도 친북인사명단에 올라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통합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지, 정부에 묻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원한을 가져올 뿐. 원한을 버릴 때에만 화해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했다. 작년에 선종한 김수환추기경은 마지막까지 "서로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제발 원한을 끊자고, 분열과 적대를 청산하자고. 간절히, 간절히 호소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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