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량
안희연
수신인을 알 수 없는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열어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되돌아갈 집이 된다는 것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날마다 햇빛 쪽으로 끌어다 놓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모든 일들이 저 작은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작고 하얀 벌레는 순식간에 불어나 온 마음을 점령했다 상자가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하루도 조금씩 휘청거렸고
고작 상자일뿐이었다면 쉽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더구나 생명이라면
너는 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
《현대시학》 2016년 10월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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