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펌프 / 권영준
한 옥집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녹슨 펌프, 저 녹슨 물건에도 한 때는 뜨거운 피가 흘러
여인의 가랑이를 팽팽하게 밀치고 들어가 찬물을 길어 올리던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단단한 기둥을 둥글게 말아 쥐고 차디찬 정수를 길어 올리던 그 날, 뜨겁던 사랑은 천 년의
고독으로 엉겨 붙었다 들뜬 환희를 뒤로 한 채 밤꽃 내음 맑은 샘물은 뿌리에서부터 말라
오그라들었고, 이제 절망의 긴 냉기를 홀로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시간이 왔다 더 이상 피는
끓어오르지 못한다 언제까지 넌 끝나버린 사랑을 회억하며 미라의 모습으로 견딜 것이냐
자각하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집착은 없다 펌프질의 한 시절이 아름다웠다, 고 생각하라
텅 빈 너의 기둥을 잡고 아래위로 흔들어보니 사막의 모래 같은, 그러나 아직은 따뜻한 눈물이
둥근 구멍에서 흘러나온다 너에게 용서는 지나친 사치임을 깨닫게 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소각로 주물공장에서 서럽지 않을 꼿꼿함으로 다시 환생할 녹슨 펌프야, 죽음보다
두려운 그것이 내게도 하나 덩그러니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이쁜유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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