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다산의 제자 이강회의 선박연구 / 박석무

문근영 2018. 11. 13. 00:20



 

580

 

다산의 제자 이강회의 선박연구


요즘에야 다산학단(茶山學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8년의 강진생활에 다산의 가르침을 받은 학자군(學者群)의 집합체를 학단이라 부른다고 여기면 됩니다. 강진읍내의 8년 생활에 제자로 5~6명, 10년의 다산초당 생활 때의 다신계(茶信契) 소속 18제자를 모두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 소속에 포함되지 않으면서도 다산의 학풍을 제대로 계승한 외손자 윤정기(尹廷琦)같은 학자도 포함됨은 물론입니다.

전에 소개했던 대로 지난해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다산학단문헌집성』 9책이 간행되면서 다산의 경학이나 경세학이 후학들에게 어떻게 전수되어 확대 발전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 다산학단의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임에 분명한 이강회(李綱會)의 학문적 수준과 남긴 업적이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字)가 굉보(紘父)로 유명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후손이자 고산 윤선도의 사위인 이보만(李保 )의 5대손이 바로 이강회였습니다. 다산이 2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한 해에 태어난 이강회는 외선조들의 고향에서 가까운 강진에서 세거했는데, 1808년 다산이 48세의 나이로 다산초당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던 해에 20세의 청년으로 다산의 제자로 참여했습니다.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일정 수준의 학식이 있던 이강회는 1808년에 다산이 저작한 『역학서언』이라는 책에 등장하고 있으며, 1812년의 저작인 『춘추고징』에도 이강회의 도움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813년의 『논어고금주』, 1817년 해배 한 해 전의 『상의절요』라는 책에도 이강회의 조력이 있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1818년 57세로 다산은 해배되어 귀향하고 이강회는 손암 정약전이 귀양 살다 세상을 떠난 소흑산도, 즉 우이도(牛耳島)로 들어가 손암의 『표해시말』을 새롭게 정리하였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인 문순득의 집에 기거하면서 더 자세히 표해시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바다의 해운과 어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박제도에 대한 깊숙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운곡선설(雲谷船說)』에 보이는 배에 대한 이강회의 연구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연구임에 분명합니다. “바다로 들어간 이강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해양산업의 발전과 선박제도의 개선을 위한 이강회의 실용주의적 학문은 경이로운 분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산의 『경세유표』에도 조운책(漕運策)의 논의가 많은데,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이강회의 해운책은 더 귀중한 내용입니다. 3면이 바다로 싸인 대한민국, 강의 운하보다는 그런학자들의 해운정책을 활성화 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닐까요.

박석무 드림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목록보기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