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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5 《현대시》신인상 당선작 / 김민우, 김호성

문근영 2018. 10. 23. 03:40

[2015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 김민우 김호성

 

젓가락질 신봉자 외 1/ 김민우

 

 

   오랜만에 만난 은사님은 젓가락질 신봉자였다 젓가락질을 사랑한 나머지 젓가락질에 관한 고찰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그는 한 20년 세월에 걸쳐 젓가락질을 전도했다는데, 가난하다 못해 젓가락질조차 못 배워서는, 힘들게 주먹 쥐고 젓가락질을 하던 사람들이 젓가락질이라도 잘해서 밥반찬을 잘 먹었으면, 자꾸 안타까워서, 그들에게 오늘도 나는 한민족 유구한 전통의 젓가락질을 선보인다는 게 은사님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20년 간 주먹을 쥐고 젓가락질을 하던 나에게 있어 은사님의 젓가락질은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스터디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내내 젓가락질을 찬미하던 은사님에게 참다 참다 나는 불만을 토로했다 …… 저는 물리를 공부해서 말이죠, 힘의 평형 법칙으로 보아 제가 주먹 쥐고 하는 젓가락질로도 충분히 안주를 집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치원 다니던 이래로 20년 간 임상실험까지 마쳤거든요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은사님은 비웃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젓가락질하지 말라고 가르쳤잖아? 젓가락질조차 과학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거야? “아뇨, 저는 이런 식으로도됐고,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는 너는 포크나 쓰렴, 젓가락질을 모욕하지 마, 젓가락을 모욕하지 말라고, 내가 시범을 보이마, 은사님은 나에게 한 수 가르치려는 듯이 열렬히 젓가락질을 해서 안주를 잡수셨다 젓가락질을 못해도 젓가락을 쓰다 보면 젓가락질을 나름 연구할 수도 있는 거죠뒤이어 나는 은사님이 너무 젓가락질 그 자체에만 손을 쓴다고 지적했는데, 당연히 젓가락질 신봉자라면 젓가락질 하는 데에만 손을 써야지, 어디다 손을 쓸래? “나는 주먹 쥐고 젓가락질을 참 잘한다시 쓰는 데에 쓸래? 은사님은 정말 쓸데없이 젓가락질에 자부심을 느꼈다 너, 그런 식으로 주먹 쥐고 젓가락질을 계속하다간 손이 피로해지고…… 병들어서 썩어 들어가고, 젓가락질은커녕 밥주걱도 한 사발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딴 식으로 주먹 쥐려면 젓가락 대신 윷가락이나 던지란 말야, 그럼 윷이야, ! 카타르시스라도 느낄 수 있겠지, 가락에 가락으로 침 튀기며 지적질하다, 은사님은 안주를 너무 많이 잡수셨는지 꾸르륵 소리를 내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되지만 좀 화가 나서 같이 있던 선배에게 은사님 뒷담화를 했다 은사님이 불쌍해요, 젓가락질에 완전 갇혀 있는 건 아닌지그러면 네가 젓가락질을 제대로 배워서 은사님보다 젓가락질을 더 잘하면 되지, 선배 역시 은사님처럼 한민족 유구한 전통의 젓가락질을 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나는 흥분해서, 주먹 쥐고 젓가락질해서 선생보다 선배보다 더 많이 안주를 먹으려는데, 덩달아 흥분한 손은 주먹을 쥐고 젓가락도 제대로 못 잡아서, 울화통이라도 식히려고 그냥, 입 안에 소주만 막 들이 부어댔다 속은 뒤집어지고, 젓가락도 제대로 못 잡아서 가운데 손가락으로 안주를 찍어먹고 싶은 밤이었다

 

 

 

나의 만년필

 

 

나의 만년필은 하얬죠.

보통 만년필은 진한 빛깔인데,

잉크가 얼룩지는 걸 감추기 위해서래요.

그것도 모르고 하얀 게 예뻤어요.

 

처음 접한 야동에서 순백을 보고

순결한 건 전부 하얗구나,

단단히 착각이 들었던 적에처럼.

 

만년필은 주인을 닮는다는데

 

지금은 조금은 누렇게 얼룩지죠.

조금은 촉이 구부러지고

조금은 구부러진 말들을 배설해요.

 

나의 만년필은 치질에 걸렸나 봐요.

힘줄들이 줄줄이 탈장하는 주먹을 불끈 쥐다

뿌직 끊어진 괄약근처럼

뿌직뿌직 물똥처럼 말을 지려요.

감추지 않고

 

내가 하얀 만년필과 씨름할 적에

검은 만년필만 쓰던 선배는 못마땅해 했죠.

누런 얼룩도 그렇고, 뭣보다도

힘 주지마라, 만년필도 너도 너덜너덜해진다.

 

줄줄 지리는 말들이 뭉개졌어요.

중학생 때 싸구려 마스카라 칠하고 어딘가 드나들고

끌려간 같은 반 친구처럼

그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데……

낱말들 짠하게 맺혔어요. 채 문장도 되지 못하고

어정어정 마스카라만 번져나갔죠.

 

가면 갈수록 만년필은 고개를 숙여요.

당당해지려 애쓰는 주먹은

만년필만 두어 번 바닥에 떨어뜨리고

 

우린 그렇게 낡아가요.

조금은 구부러진 채

 

……괜찮아요.

 

너덜너덜한 대로 지껄일 거니깐,

조금은 구부러지는 채

 

 

 

 

김민우 / 1989년 서울 출생.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서강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재학중.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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