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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4 詩로 여는 세상 작품상]

문근영 2018. 9. 11. 02:55

[2014 詩로 여는 세상 작품상]

 

검은 모래  외 2편

 

   이 원

 

 

 

발목과 손목을 해변의 모래에 파묻은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하늘이 길고 넓은 천처럼 내려왔다 펄럭이기 직전이다 색이 자꾸 바뀌었다

 

아이들은 모래에 말굽자석처럼 척추 뼈를 말아 넣고 있다

아이들의 몸에 원무가 들어있다 떠밀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파도도 파도소리도 검다

허공은 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중

모래도 검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바람에 씻긴 말들이 데리고 오나

 

안간힘으로 달빛을 밀어내주고 있을 것이다

물 밑을 열며 올라오는 손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검은 모래에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을 파묻고 있다

물이 들어오는 해변에 아이들이 있다

 

신이여 아이들을 버리소서

세상이 이미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못 박힐 순결한 손이 필요 없나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아이들을 삼켰다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하므로

당분간 종려주일은 없을 것이므로

 

                     —《포지션》2013년 여름호

 

 

애플 스토어

 

 

숲이 된 나무들은 그림자를 쪼개는 데 열중한다

 

새들은 부리가 낀 곳에서 제 소리를 냈다

 

다른 방향에서 자란 꽃들이 하나의 꽃병에 꽂힌다

 

늙은 엄마는 심장으로 기어들어가고

 

의자는 허공을 단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신맛과 단맛이 뒤엉킬 때까지

 

사과는 둥글어졌다

 

                    —《시인동네》2013년 가을호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7cm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플라스틱 칼처럼

한여름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출판기념회처럼 고독하다

영혼 없는 영혼처럼

코스프레처럼 고독하다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복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한 개에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하나의 창에서

 

인간의 말을 모르면서도

악을 쓰며 우는 신생아처럼

침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노인처럼

 

물을 마시고

다리를 접고 펼치고

반은 침묵

반은 허공

 

체조선수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제 속을 불 지르고 만 새벽 두 시 도로처럼 고독하다

길들은 끊어지고 싶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수목장 나무 앞에 놓인 딸기우유처럼 고독하다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말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의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펭귄은 지구에서 고독하다

토끼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주파수 93.1MHz가 잡히는 지구는 고독하다

 

                    —《21세기문학》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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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 1968년 경기도 화성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1992년 계간 《세계의 문학》가을호에「시간과 비닐봉지」외 3편으로 등단. 시집『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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