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2012년 <<시작>> 신인상 당선작-류명순

문근영 2018. 9. 11. 02:35

글자 만드는 골목


류명순


바람이 녹슨 자물통을 잡아 흔들며 대답을 강요한다

복덕방에 고여 있던 시간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풍경으로 위장한다

잡풀들이 잃어버린 번지를 기웃거리며 대궁을 내민다

가옥들이 파산한 사내 등을 기댄 여자의 고개처럼 슬픔을 진열한다


칠성댁이 행방불명된 딸의 얼굴을 안고 골목을 나선다

전단지 속 눈빛이 별의 온도로 반짝인다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이 발걸음을 덮어쓴다

경전에도 없는 기호로 음각된 골목, 침묵의 색깔로 굳는다


<마지막 처분 95% 세일>

전봇대에 묶인 밥상 크기 현수막만 새카맣게 시끄럽다


한 번도 팔린 적 없는 동네에는 어둠이 먼저 퇴근한다

북두칠성이 끼니 거른 외등을 하나둘 깨운다

우거짓국 냄새가 낮은 지붕마다 방점을 찍는다


손잡이만 반들거리는 고물 리어카가 파지를 가득 싣고 와 골목 한켠을 복원한다

칠성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돌아온다

다리로 침묵을 지고 나갔던 사람들이 입으로 다리를 끌고 온다

유리창에 그림자를 맡긴 사람들이 뿔뿔이 집으로 들어간다

유리창 풍경이 몇 년 전 시간으로 창문을 복원한다


바람이 갸웃거리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를 밤새 읽는다

제 발로 쓴 골목을 저승길로 읽는 사람은 문맹이 아니다



 

 

고문은 진화 한다


류명순

   

   불시에 나를 구속한 스티븐 존슨*은 희대의 고문기술자다. 눈을 떠 빛을 데려오면 그는 내 장기마다 하루 치의 수명을 부여한다. 오늘은 그가 되돌이표 그려진 악보처럼 나를 연주 한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음표를 벗어난 신음을 뱉어낸 적이 없다. 이십 년 전에는 첼로 현처럼 휜 척추로 연주했고, 십 년 전에는 각막에 펼친 건반을 올려 차며 연주를 했다


   그가 내게 배려한 유일한 자유는 목숨이다. 나는 사디스트가 되어 나를 때리고 마조이스트가 되어 고통을 충전했으므로 내 목숨과 고통은 정비례한다. 나는 희열이 있는 곳으로 진화했다. 통증으로 사정을 완성하던 날, 그는 새로운 고문기술을 접목했다. 손톱이 뽑힐 때 음역 밖의 신음을 연주한 것은 실수였다.

   그가 내게서 손톱과 닮은 둥근 각도를 찾아 뽑아내기 시작했다 발톱을 뽑아내고 앞니를 뽑아내고 각막을 뽑아내고 결국 양지에서 나를 뽑아 음지에 가두었다.

   눈을 떠도 빛을 데려오지 못하므로 나의 하루는 길이가 없다. 열쇠가 없는 안구의 독방에서 내 묵비권이 완성됐다. 내가 내게 종신형을 언도하자 고문이 멎었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열쇠를 목숨에 꽂아놓고 사라졌다.

   신음을 연주해서 형기를 채워야 하는 내가 고통 없음이 더 큰 고통임을 알았을 때,

나는 외로움을 비틀어 고통을 초대한다. 그가 내 장기를 하나 둘 두드려 깨운다. 나는 목숨에 없는 빠른 박자로 신음을 연주한다. 그가 관장하는 하루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스티븐 존슨: 약물 알레르기로 눈의 점막을 손상시켜 실명에 이르는 난치병





사람의 품


류명순


미루나무 껍질에서 나이테의 파동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손가락 한 마디씩 늘인다

이파리가 그늘의 나선을 돌린다


넓어지는 그늘에 내가 얼룩 하나로 섞인다


내 잠꼬대가 다른 사 호흡으로 바뀌자 그늘이 확장을 멈춘다

옹이 빛깔의 눈동자가 전생을 끌어당긴다

한 사람이 기도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합장의 어둠을 열고 무작정 걸어 들어간다

매일 다녔던 것처럼 익숙한 길 끝에

내 얼룩과 마침맞은 공간이 파여 있다


먹는 자세를 하고서야 꿈을 꾼다

한 사람이 손 그림자로 내 배를 쓰다듬고 있다

품에 안긴 내가 그늘의 속도로 자란다


아기 발길질에 얼룩이 깨진다

내가 서쪽을 향해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내 눈동자에 한 사람의 얼룩이 고여 있다

내가 그의 기억을 외우려고 하자 그늘이 나를 팽개친다

그늘이 사지를 숨기며 미루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사람의 얼룩을 품으로 키워내면 어머니가 된다


형법 제38조


류명순


충혈된 눈에 들어온 형법 제38조가 수갑을 채운다

방안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서른여덟을 염탐하는 담쟁이가 방안을 기웃거린다

법전 속에 숨긴 법문이 미궁에 빠져든다

승자독식사회의 알리바이를 밝혀내기 위해

육법전서의 침묵을 몇 년째 추적해 보지만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고 제자리 잠복 중이다


그림자를 체포해 가는 그믐달이 보이지 않을 때

고양이가 어머니기도를 의심스레 쏘아본다

잠을 취조하는 시계 소리에

별들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또다시 법률사전을 비워내야 하는 공복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파산선고를 받은 등골뼈들이

호시탐탐 무릎까지 넘보고 있다

기다리지 못한 사랑을 수첩에 기록하고 

날 선 법과사전에 시선을 책갈피로 꽂아두면

두 눈에 고여 있던 하늘이 빛을 흘린다

법복보다 더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 골목

고시촌 하늘엔 별도 법문처럼 뜬다




무덤으로 가는 앤디워홀

 


류명순


나를 버리러 지하로 간다

캔버스와 판화도구 버리러

내가 사랑하던 마릴린 먼로도 버리러

세상의 희롱과 박수까지 버리러

주유소도 편의점도 없는 지하의 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 혼자의 길


누구 하나 환호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사물들, 구조는 단순하다

주검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도 없는

무의식의 풍경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나를 다녀간 사람들이 기록해둔 필름처럼

기억이 기억을 물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문득, 까마귀가 울 것 같은 적막이 몰려들고

붓을 든 낯선 손을 따라

무덤속이 밀밭으로 변하고 있다

복제된 그림이 제멋대로 불어나 무덤을 밝힌다


버리는 것은 끝이 아니고

또 하나의 부재를 달고 새롭게 태어난다

수많은 존재들을 버린 내 몸이 한없이 추락한다

낯선 내가 나를 붙잡아 콜라병에 담는다

순간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경기 안성 출생


 

심사평

 

 

   ‘아, 나는 깨어있는가. 아니, 꿈은 아니겠지. 내가 누구인지 말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세익스피어는 <리어왕>의 입을 통해 이렇게 물었다. 나는 나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 존재, 가능성의 존재, 시간성의 존재, 비가역성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한 낱 지각들의 다발인가. <리어왕>은 단 한 번 물었지만 시인들은 영원히 대답한다. 그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세상이 번잡하고 혼란스러울수록, 불안하고 권태로울수록 시가 더욱 절실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12년 <<시작>> 신인상에 700여 편의 투고작이 들어왔다. 비본래적 실존 속에서 본래적 실존을 찾는 행렬의 장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최종심에 4명이 올랐다. 채선주,박영수,류미효, 김명호가 그들이다. 채선주의 작품은 시상의 단일한 집중성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주제의식이나 시상을 끌고 가는 화법이 너무 관습적이고 소박하고 조심스러웠다. 박영수는 자기만의 시적 개성과 어휘를 구사하는 능력이 눈길을 모았다. 지역적 토속어가 시적 새로움과 간곡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뚜렷하게 부각되는 대표작을 꼽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상대적 비교 속에서 당선작을 뽑아야 하기 때문에 일단 보류되었다. 거듭 아쉽다. 유명순은 시적 삶과 어휘가 숙성되어 있고 육화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글자 만드는 골목」은 골목의 내력을 글자의 풍경으로 증언하는 발상이 신선하고 자연스럽다. 그래서 “제 발로 쓴 골목을 저승길로 읽는 사람은 문맹이 아니다” 라는 결구가 더욱 간절하다. 김명호는 자신만의 매력적인 시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마치 한 편의 상황극을 보는 듯하다. 특히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의 경우 사랑의 서사를 상상의 존재성으로 치환시키는 능력이 흥미롭고도 절실하다. 그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답하고 있다. 그것이 상상이다. 거듭 되내이고 곱씹어보게 되는 답변이다. 류미효와 김명호를 공동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심사위원- 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홍용희

 

 

<<당선소감>>


 

내게 시를 쓰게 한 원동력은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하루의 길이를 일생으로 믿고 있는 남편이었다. 타자의 고통으로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드러난 것보다 감춰진 것이 더욱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늦은 나이에 시를 쓰겠다고 무작정 덤벼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몇 년이 흘러버렸다. 내 앞의 시는 잡으려 하면 잔상처럼 달아나고, 잡았다 싶으면 막을 내린 암전처럼 아무것도 없는 존재였다.


   나의 스승인 자연과 사물 그리고 언어에 늘 미안했다. 내 마음이 인정하는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나를 참으로 많이 혼냈다. 대학 문학상 수상과 유명 백일장 수상 그리고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발견하는 내 이름을 사다리로 몇 해를 건너왔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나와의 약속을 다잡고 마음을 내려놓으려 할 때, 등단 소식이 다시 나를 운명에 묶었다.


   내게 온 기쁨이 젊은 시인의 길을 가로막는 건 아닌지 무거운 마음이다. 이 빚을 정말 열심히 하는 것으로 갚겠다. ‘남편의 하루’에 잠시 시침을 멈추게 해, 남편에게 저물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시작』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시의 발화점을 알게 해준 오봉옥 선생님, 시 인생의 가르침을 주던 선생님 문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시 쓰기를 접고 어려운 일로 낙망하던 나에게 관심과 격려로 한 발짝 시운을 내 딛게 해 주신 차주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문학과 대학공부를 병행하겠다고 설치던 나에게 긍정과 믿음을 준 남편과 딸 효진, 윤진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다.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3학년 재학 중. 
저서 :  잃어버린 20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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