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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람의 ‘화원’, 그들의 이야기 / 신병주

문근영 2018. 8. 6. 06:54

제120호 (2008.12.17)


바람의 ‘화원’, 그들의 이야기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최근 드라마나 영화에서 화원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 이어 영화 ‘미인도’가 개봉되면서 조선후기 화원 바람을 주도하면서, 김홍도와 신윤복의 묻혀진 삶과 그림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났다. 그런데 우리는 김홍도, 신윤복의 이름 석 자와 대표작 외에 다수 화원들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기록을 만드는 역사가 또는 사진기자


조선시대의 화원은 국가의 공식기구인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그림 그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행하였던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미술가, 화가인 셈이었다. 조선시대 화원들의 활동은 도화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개는 국가에 필요한 실용적인 그림이나 기록화를 그리게 되었다. 화운 이외에 화가를 부르던 명칭으로는 화공(畵工), 화사(畵師) 등이 있었다. 도화서는 조선초기에는 도화원이라 불려졌으나, 격을 낮추는 과정에서 도화서가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 6품 관청으로, 제조 1인, 별제 2인 외에 잡직으로 화원 20인이 있었다. 정조 시대에 편찬된 『대전통편』에는 화원의 수가 증원되어 30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원들은 왕이나 명망가들의 초상을 그렸으며, 지도를 제작하는 일도 국초부터 화원들의 몫이었다. 또한 기계류와 건축물의 설계도, 책의 삽화, 외교사절을 수행하면서 외국의 풍물을 그리는 일도 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결혼식, 장례식, 궁중 잔치 등 국가의 주요행사가 거행되면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에는 행사 장면이나 기물 등을 첨부하였는데, 물론 그림의 제작은 화원들이 담당하였다. 의궤에는 그들의 실명을 기록하여,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부여하였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식을 기록한 의궤의 화원 명단에는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왕의 결혼식을 그린 『가례도감의궤』의 끝부분에 그려진 반차도에는 결혼식에 동원된 사람과 말의 모습, 복장과 깃발 등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마치 현장에 참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의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일부


조선시대에는 당시의 역사적 흔적들을 더욱 생생하게 후대에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뛰어난 화원들의 능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화원들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화원들은 오늘날의 사진기자, 나아가 역사가의 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역사현장을 담은 영상자료


화원들은 조선시대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된 지도 제작에도 헌신하였다. 조선시대 지도 중에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조선후기 우리의 산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가 널리 유행하면서, 이러한 화풍은 지도제작에도 반영되었다.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그린 「도성도」는 세련된 진경산수 화풍으로 도성 주변의 산세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어서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인 1872년 전국 460여 군현의 모습을 그린 지도는 지역별로 제작되어 각 지역마다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중 가장 회화적으로 그려진 전라도의 지도들은 음양오행 사상에 입각하여 색채를 적절하게 조화시켰으며, 예술적 가치도 가장 뛰어나다. 이들 지도에는 당시의 사회 모습이 마치 영상자료처럼 담겨져 있다. 대원군 시대의 국가정책인 쇄국정책이 지도에 반영되어 작은 군현에 이르기까지에도 척화비를 그린 모습이나, 남원 지도에 과장되게 표현된 광한루와 오작교, 해남과 진도의 지도에 표시된 거북선의 모습, 천안지도의 관아건물에 표시된 태극무늬, 등은 130 여 년 전 사회로 안내한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작품 활동 보다는 의궤나 지도제작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연행사나 통신사와 같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명단에는 화원이 꼭 포함되었다. 화원들이 남긴 일반 감상화는 국가와 궁중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방편으로 그린 것이 많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국가의 공식행사에서 차지하는 화원들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대우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화원들은 국왕이나 유력한 벼슬아치들의 영정(초상화)도 직접 그리면서 그들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였다. 조선후기 이후 화원들은 중인의 신분으로 되었고, 그 직업은 세습되어 나갔다. 양천 허씨와 인동 장씨, 경주 김씨, 배천 조씨 등은 17세기 이후 영향력 있는 화원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초상화의 곰보자국, 임금행차 주변의 좌판


화원들이 그린 『의궤』등의 기록화나 초상화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이 담겨져 있다. 조선후기에 고위직을 지낸 인물의 초상화에는 대부분 곰보 자국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이들이 어린 시절 홍역을 앓았다는 증거로서, 당시 벼슬아치들도 홍역을 앓은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 대부분은 홍역으로 크게 곤욕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가던 상황을 기록한 병풍에는 임금의 행차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경하고 행렬 주변에 임시로 좌판이 벌어지는 모습과, 정렬된 상태지만 자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주교(舟橋:배다리)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처럼 화원들의 그림 속에는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이 생생히 드러나고 있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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