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황동규 , 김화영
전대호의 '상처'는 종래에 흔히 만나던 <신춘문예> 특유의 타성이 느껴지지 않아서 매우 신선하다. 매우 절제되고 정확한 묘사, 태를 부리지 않는 시선, 그리고 대담한 전환 모두가 유망한 자질을 보여준다.
이 시에는 극적 감각이 있다. 이 시인은 장식없는 사문적 언어의 어디쯤에 전기스위치를 넣으면 돌연 언어공간 전체에 폭풍이 일어나는지를 감지할 줄 안다. 그냥 말뿐이 아니다. 평범한 현상, 사실, 풍경의 어디쯤에 매듭이나 배꼽이 있는지를 가늠한다. 그 중심으로 모이는 순간의 격정이나 질서를 부여하는 역량, 그래서 이런 시의 여백은 삶의 깊이만큼 적막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 '구름의 뿌리'도 수작이다. 부디 안이함에 정신을 맡기지 말고 정진하여 놀라운 시인이 되기 바란다.
당선시 : 상처
전대호
1969년 경기 수원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상처
1
버스가 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옆에 선 사내가 근육을 긴장시키며 손잡이를 움켜쥔다. 사내의 팔뚝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보인다. 둥글고 큼직하게 주위 살들을 잡아당기며 아문 흉터가 세 개 일렬로 박혀있다. 언제였던가 나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많이 먹고 친구들 앞에서 고통을 참으며 독하게 지졌었다. 상처는 많이 부풀어올랐다. 며칠동안 팔 전체가 화끈거렸고, 화끈거렸지만 아무 흉터도 남지 않았다.
햇살 내리네 저 햇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따사로운 햇살
사내는 아마 물집이 생긴 자리를 세 번 이상 더 지졌을 것이다. 아무도 근접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기억을 훈장처럼 팔뚝에 새겨넣기 위하여 사내는 아까처럼 근육을 긴장시키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젖은 숫돌처럼.
2
지나간 일들은 정말로 지나가 버린다. 그날에나 지금에나 햇살 저 햇살,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만 있다. 그런 식의 무례한 작별인사는 그를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들꽃에게라도 말 걸고 싶은 발걸음. 얘 너도 집이니? 아니 나는 성이야.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 기억만 고대 인류의 꼬리뼈처럼 진화의 문턱에서 흔들거릴 뿐.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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