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1992년 조선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8. 4. 12. 23:11

심사평 : 박두진 , 황동규


김수영의 '귀향'은 직접적인 체험이든 대리 체험이든 체험에서 나온 시이다. 그 점이 그의 스케일이 훨씬 더 큰 다른 작품 '흑고래'를 제쳐두고 이 작품을 택하게 만들었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같은 녹슨 배의 철골", "산비알 붉은 고구마 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 좋은 바람" 같은 표현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험하고 고된 바다 생활 속에서도 "할망구짝난 바테리로 둘둘거리는 배" 같은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묘사도 체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시에는 현장이 있고 깨달음들이 있다.
그 깨달음들의 끝에, 이 시의 마지막 몇 행에, '귀향'의 구조에 대한 하나의 절실하고 의미있는 깨달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 깨달음은 삶이 무엇인가를 되생각하게 해준다.
 

당선시 : 남행시초1

 
 
김수영
1968년 경남 마산 출생, 경상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남행시초 1
--귀향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년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팍을 비집는 마을의 불빛
눈알 뒤집으며 주먹다짐하기도 하면서
파도가 높음, 파도가 높음, 긴급구조 요망 긴급구조
깜박깜박 이 많은 골짜기를 감춘 세파에 자물쳐도
기다려라, 또 계속 가라
바람없는 낮엔 뜬 구름만 쇠주병에 담아 띄우기도 했어
때로는 잊혀지기도 해야할 젊은 날들처럼요
아버지에게도 바다는 길흉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을까
이미 예정된 깊이가 보이는 여정이었을까
하루 필요한 물과 기름을 받으면서
할망구짝난 바테리로 둘둘거리는 배가
언제 덜컹 무심한 돌섬에 묻힐지 모르는 일
나는 같이 늙어가는 박씨의 사투리가 좋다
살아갈 날이 아침 안개속 첩첩으로 걸리믄
달포씩 밭그늘에 묵었던 지게가 낙락장송으로 뵈이고
지겟다리에 걸쳐둔 호멩이도 학모가지로 보이능거
아버지의 그리움도 갈수록 바람의 주먹이 매운
물주름으로 되돌아 왔었을까
한순간 바라다보고 있던 황량한 벌이
손바닥을 펴서 보여준
풀씨들의 집만 무수히 뚫린 외길로 통한 끝없는 황혼
담배만 되새김질하던 염소새끼까지도
흙먼지에 섞여 놓여나기만 하면
같은 피붙이를 기막히게도 찾아가는
떠도는 것만이 제 몫인 뿌리들은
이제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