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도 많은 경우에 ‘만약 어떠했다면’ 이라는 말을 거론할 때가 빈번합니다. 지난 주말에도 산우들과 등산하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도 최근 아쉽게 종영한 ‘이산’이라는 TV사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대다수의 의견은 역시 ‘만약 정조대왕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우리가 일본을 앞서갈 수 있었을 것인데’라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토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꿈과 이상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은 지난 일의 아쉬움을 못 버리고 ‘만약’ 어떻게 했더라면 반드시 어떠했을 것인데 라는 미완의 비애를 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어렴풋이 지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도 대체로 그런 아쉬움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1884년은 고종황제 21년입니다. 이 해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국가개혁에 대한 국민적 여망도 커갔으며, 임금도 조금 정신을 차리면서 개혁에 대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나 봅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갑신년 직후인 1885~1886년에 정약용의 후손가에 연락해 『여유당집』이라는 다산의 저서를 올리라는 명령을 했다는 것입니다. 문집을 받아 읽어본 임금은 정약용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 살아 있지 않음을 강개한 마음으로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만한 학식·경륜·개혁사상을 지닌 신하가 있었다면 정말로 한 번 제대로 나라를 통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1886년은 다산이 세상을 떠난 50주년의 해였습니다. 사후 50년 뒤에야 국가적으로 다산의 학문과 사상이 인정받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일본의 침략이 음험하게 진행되던 때입니다. 결국은 임금은 어떤 개혁도 하지 못하고 다산의 증손자 정문섭(丁文燮)을 문과에 급제시키는 일로 끝나고 말았다고 매천 황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약’의 언어를 잊지 못합니다. 그때라도 다산의 저서를 제대로 읽어보고 그의 국가개혁과 사회변혁의 뛰어난 논리를 제대로 통치에 반영할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역시 아쉬움으로 남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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