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의 처녀들
김상미
아비뇽의 처녀들은 촉촉이 젖은 살갗 위에
옷 대신 캄캄한 밤을 입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 빛이 나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남이 입던 신의 축복 따위는 청동거울 속에 집어넣고
당신 때문에 활활 사랑이 불타오른 척
당신 머리 위를 노래하는 새처럼 날아다닌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비뇽의 처녀들은
한 여인이면서 다섯 여인 몫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이 세상에 어떤 美가 존재하는지 어떤 시인이 그 美를 찬양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당신 눈빛과 마주치고
그 눈빛에서 절망 대신 환희가 솟아오르면
화창한 주말 날씨의 해변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궁을 한껏 열어
당신을 품고 당신을 낳을 뿐
한 번도 누구누구의 정식 연인이 되어본 적 없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홀로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발가벗어 그림자 진 당신 영혼에
기쁘게 은방울꽃과 데이지꽃 수를 놓으며
서둘러 짐 챙겨 떠나는 이 세상 모든 이별의 왈츠가
이제는 당신 마음속에서 끝나기를 곧 끝나버리기를 기다린다
캄캄한 밤을 달래는 푸른 달빛이 서서히 서쪽에서부터 차올라오듯이
—《시인동네》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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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잡히지 않는 나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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