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혹등고래 / 정채원

문근영 2018. 3. 17. 09:45

혹등고래

 

  정채원

 

 

 

 

이따금 몸을 반 이상 물 밖으로 솟구친다

새끼를 낳으러

육천오백 킬로를 헤엄쳐온 어미 고래

 

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그것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

 

어미는 새끼에 젖을 물린 채 열대 바다를 헤엄친다

그런 걸 알게 될 때쯤 새끼는

극지의 얼음 바다를 홀로 헤엄치며

어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도 있겠지

 

코고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신음소리가 섞여

긴 노래가 되고

 

예언처럼 멀고 먼 주름투성이 바다

뻔하고 모호한

젖은 몸뚱이는

 

이따금 물 밖으로 힘껏 솟구친다

다른 세상을 흘낏 엿보면서

그렇게 숨을 쉬면서

 

 

 


                        —《시인수첩》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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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원 / 서울 출생. 1996년《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나의 키로 건너는 강』『슬픈 갈릴레이의 마을』『일교차로 만든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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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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