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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항아리 속의 시인 / 남진우

문근영 2018. 1. 2. 00:15

항아리 속의 시인

—알리바바와 사십 인의 도둑을 위하여

 

   남진우

 

 

 

항아리는 고요하다

눈부신 달빛 아래 묵묵히 침묵하고 있다

 

지금 저 항아리들 속엔

사십 인의 도둑이 숨어 있다

저마다 잔뜩 웅크린 채 숨죽이고

바깥에서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깊은 밤 칼을 빼들고 집 안으로 쳐들어와

사정없이 우리의 목을 베어갈 악당들이

항아리 속에서 손톱을 깨물며 견디고 있다

사십 개의 항아리가 일제히 부서지는 순간

집 안 가득 번져나갈 함성과 비명 소리

 

항아리는 고요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어둠 한가운데서 기다리고 있다

신호가 떨어져 어떤 부스럭거림이라도 일어나기를

잠자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깨어 일어날 수 있기를

 

서서히 항아리가 떠오른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십 개의 항아리가

허공에 떠올라 달빛을 빨아들인다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며 그윽한 술내음을 풍기는 달빛

밤이 깊어갈수록 항아리 속엔 술이 차오르고

 

신호가 와도

술에 곯아떨어진 도둑들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현대시학》2016년 4월호, ‘남진우 자선 대표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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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 1960년 전주 출생. 1981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 1983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등단.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죽은 자를 위한 기도』『타오르는 책』『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사랑의 어두운 저편』등.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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