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705)/ 멕시코
용설란 재배지 경관과 옛 테킬라 생산 시설
(Agave Landscape and Ancient Industrial Facilities of Tequila; 2006)
할리스코 주[Jalisco State], 발레스 현[Valles Region]에 위치한 테킬라(Tequila) 화산과 리오그란데(Rio Grande) 강 사이의 계곡에 있는 유적지이다. 넓이는 34,658㏊이며, 푸른 용설란이 자라는 넓은 지역에 있다. 푸른 용설란은 16세기 이후 지금까지 테킬라 술의 원료가 되었고, 2,000년 이상 발효 식품과 직물을 만드는 원료였다. 이 곳에는 19세기와 20세기에 세계적으로 테킬라 소비가 증가되었음을 보여주는 양조장이 지금도 가동 중이다. 오늘날에는 용설란 재배가 국가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푸른 용설란 경작지와 테킬라와 아레날(Arenal), 아마티탄(Amatitan) 같은 도시가 있다. 용설란의 밑동을 ‘파인애플(pineapple; 스페인 어로 pina)’이라고 하는데, 테킬라에는 이 파인애플을 발효하고 증류해 술을 만드는 대형 양조장이 있다. 유적지에는 농경지・주택・의례용 언덕・구장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들의 모습은 200~900년에 테킬라 문화를 증거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야생 용설란을 재배하기 시작한 때는 약 3,500년 전으로 보인다. 이 야생 식물은 리오그란데 강 계곡이 원산지로, 토양이 척박한 테킬라 지역에서 자라기에 적합하다. 용설란은 테우치틀란(Teuchitlan)에서 널리 재배하기 시작했고, 여러 기본 물품을 얻었다. 섬유소는 옷감과 밧줄・종이를 만드는 데 썼으며, 꽃의 줄기는 건축 목재로 사용했다. 다육질 잎은 지붕 기와와 연료로 썼으며, 가시로는 바늘과 화살촉을 만들었다. 수액은 꿀과 약품으로 사용되었고, 발효시켜 술을 빚기도 했다. 테우치틀란은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였는데, 지도자들은 용설란을 독점해 부(富)를 축적했다. 한편 식물의 전분을 음식이나 술을 만드는 설탕으로 바꾸려면 파인애플[피냐]을 요리해야 했는데, 사율라(Sayula) 호수[등재 지역 밖에 있음] 인근에서는 기원전 400년에 파인애플을 조리했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바로 화산석으로 만든 원뿔 모양의 화덕으로, 이 화덕을 나무로 예열한 후에 줄기와 진흙으로 파인애플을 싸서 익혔다. 또한 스페인의 수사 프란시스코 히메네즈(Francisco Ximenez)는 1615년에 용설란을 익히고 발효시켜 만든 액에 오렌지와 멜론 껍질을 첨가해 와인을 빚는 방법에 대해 기록해 두었다. 16세기에는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점령해 산티아고 데 테킬라(Santiago de Tequila)라는 도시를 만들었고, 이곳에 살고 있던 멕시코의 토착 유목민[Caxcanes]은 점차 스페인에 동화되었다. 스페인은 유럽의 주류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의 술을 실험했다. 용설란의 액을 발효시켜 만든 증류주 메스칼(mezcal)을 만든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앤틸리스(Antilles) 제도에서 럼 주가 개발되면서, 럼 주 생산 지역에서 용설란 주류를 빚는 데 필요한 장비를 도입했다. 이렇게 만든 새 술에 세금을 부과하여 과달라하라(Guadalajara)의 스페인 정부에 중요한 수입이 생겼는데, 정부는 이 재원으로 상수 공급과 과달라하라에 있는 할리스코(Jalisco) 대사관에 필요한 자금으로 지원했다. 17세기 말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형태의 증류주 양조장이 생겼고, 첫 번째 용설란 집단 농장이 생겼다. 18세기에는 대농장 안에 산업 시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용설란 재배 지역이 넓어졌다. 술은 유명해졌고 수요가 늘어났으며, 1758년에 태평양의 산 블라스(San Blas) 항구와 과달라하라, 멕시코시티(Mexico City)를 잇는 간선도로가 생기면서 산업은 더 성장했다. 새로 난 길을 통해서 나귀와 노새를 이용해 술을 운반했으며, 이 술이 이 지역의 첫 번째 수출품이었다. 술의 생산과 소비가 크게 늘면서 이 지역의 정체성이 긍정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시민과 종교 지도자들은 술의 소비가 지나치게 늘어난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세금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금주령을 내렸지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금주령 때문에 외곽 지역에서 술을 만들게 된 것이다. 스페인이 식민 통치를 한 후, 약 300년이 지난 1795년에는 호세 마리아 과달루페 쿠에르보(Jose Maria Guadalupe Cuervo)가 처음으로 용설란 증류 양조장 허가를 받았다. 19세기 중반에 수출이 늘어나면서 대형 증류 양조장이 들어섰고, 작물 재배와 주류 생산이 분리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교외 지역의 증류 양조장이 쇠퇴했으며, 도시 지역 양조장에 공급하는 원재료를 생산하는 데 집중하게 되면서 용설란 재배 농지는 빠르게 늘어났다. 19세기 후반에는 도시의 양조장들이 통합되기 시작했는데, 증기 가열 오븐과 즙을 짜는 기계 등을 사용해 효율성을 높였다. 20세기에 들어 30년 동안 진행된 멕시코 혁명기에는 대농장의 용설란 생산이 일시적으로 줄어들어 이곳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공동 양조장이나 개인 양조장으로 옮겨갔다. 오늘날에는 수요가 많아지면서 이에 맞추어 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토지를 임대해 주거나, 용설란을 선매입하도록 하는 정책을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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