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술 깨는 나날 / 정병근

문근영 2017. 12. 4. 23:28

술 깨는 나날

 

       정병근

 

 

늑대는 어디 가고 개만 남았다

아무라도 붙잡고 싹싹 빌고 싶다

죄죄 벌벌,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기고 싶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었으니

나는 자책 전문가

잔고가 바닥난 말의 집에

불행한 예언들이 기웃거리고

시시한 잠언들이 벨을 누른다

믿지 않을 테니 그만 돌아가시오

정신의 테두리가 초끈처럼 진동한다

흉흉(凶凶)과 분분(紛紛)이 콩 튀듯이 튄다

누가 나를 다스려다오

쥐어박으며 다그쳐다오

조목조목 나를 짚어다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말의 빈집에 침묵이 찰 때까지





                      —《시산맥》2016년 여름호

---------------

정병근 /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번개를 치다』『태양의 족보』.


 

//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