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유령의 얼굴 / 길상호

문근영 2017. 10. 31. 12:51

유령의 얼굴

 

  길상호

 

 

 

쪽마루에는 사진 한 장,

햇빛이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뜯어먹고 있었다

입가의 미소까지 다 핥고도

아직 배가 차지 않는지

깨진 액자의 유리 틈까지 쪽쪽 빨아댔다

 

불꽃이 만개했던 그날 이후

흉흉한 소문들만 수시로 태어나던 집이었다

그을음이 그려놓고 간 벽화 속을

불타 죽은 고양이가 서성인다거나

손톱 빠진 아이들이 나타나서

검은 문짝을 밤새 긁어댄다거나

 

유령처럼 희미해진 사진 속 여자는

고양이에게, 아이들에게

어떤 저녁을 떠먹여주려던 걸까

명줄처럼 잘린 가스배관에서는

무거운 흐느낌이 흘러나온다고도 했다

 

표정이 다 증발하고 없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면 흘려버릴 것 같은

그 얼굴, 남은 윤곽까지 긁어먹으며

햇빛은 입술이 조금 검어졌다

 

 

 


                      —《현대시》201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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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눈의 심장을 받았네』외, 사진에세이『한 사람을 건너왔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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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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