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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리랑공연과 문명의식 / 이지양

문근영 2017. 10. 13. 08:41

제62호 (2007.10.17)


아리랑공연과 문명의식


이 지 양(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2007 남북회담 가운데 대한민국 일반 국민들에게 비교적 높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역시 공연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리랑 공연은 그 기획 동기 및 내용, 첫 공연한 년도, 규모에 있어서, 그리고 그 참가자의 연령 뿐 아니라 북측의 경제 상황과 관련지어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우리측 대표단의 관람에 대해 찬반 투표가 벌어지기도 했다.  찬반의 근거를 대충 간추려보면 이렇다.


찬성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1) 외교의전의 하나일 뿐이다, 2) 선전선동에 유혹될 사람이 없다, 3) 우리 측을 고려해서 자극적 체제 선전에 대한 내용을 일부 순화했다, 4) 있는 대로 현실을 보는 것이 좋다, 5) 그들의 문화일 뿐이니 구경해보자라는 식이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1) 국가 원수가 그런 공연을 보고 박수를 친다는 것은 국가 기강을 흔드는 일이다, 2) 체제선전과 우상화에 불과하지만 국민정서에 위배된다, 3) 동원된 어린이들에 대한 학대의 현장이자, 인권유린의 현장이다. 4) 관람 자체가 그들의 체제선전에 이용될 것이며, 우리측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행위이다라는 식이었다. 그 외에 더 다양한 소수 관점이 있었지만, 찬반의 주류를 이루는 관점은 대체로 이렇게 집중된 것 같다.


대규모 관제 공연, 논란은 있으나 관심은 없어 


그런데 공연을 관람한 이후, 그 공연의 가장 빛나는 장면들은 편집되어 여러 편의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떠있는데, 정작 남측 누리꾼들은 아무 반응이 없다. 그 공연을 보고 온 남측 대표들은 장엄하다, 착잡하다, 무섭다, 볼만했다, 어쨌든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별스럽고 세계적인 규모의 공연이다, 관광 상품으로도 좋다 등등으로 개인 소감을 밝혔고, 박수를 칠까 말까, 일어설까 말까에 대한 이야기도 후일담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도 누리꾼들은 잠잠하고, 누구하나 이 공연에 대해 깊이 있는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다. 한마디로 담론의 대상에서 저절로 소외되어버린 공연이 된 것인데, 그 이유가 뭘까?   


남측의 누리꾼이나 청소년들은 아무리 부정적인 현상 속에서도 자기가 필요한 것은 정확히 간파해서 관심을 보이는 편이다. 그래서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그가 쓴 모자가 좋으면 관심을 보이고, 세간에서 도덕적 지탄을 받는 대상이 쓴 햇빛 차단 안경, 입고 있는 셔츠 등이 멋있다고 생각하면 즉각 관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 문제의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묵직하게 평가하는 사고방식에서 보면 ‘정신없는 모방’이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느껴져서 우려하는 시선을 낳지만, 사실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복잡한 면이 있다. 그 복잡함 가운데서 긍정적인 한 면을 집어내 본다면,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 좋은 것은 따라한다’이다.


문화공연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웃고 떠들고 노는 자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외면당하는 공연이 얼마나 많은지 보라. 주목받는 문화공연은 그들 삶의 여러 요소를 상징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들은 그 무대 구성과 장치를 보면서, 그 세련됨과 새로운 기술에서 그들 사회의 미의식과 신기술을 발견하고, 그들의 새로운 문제의식과 사고의 방향, 주된 정서와 새로운 감각을 보고 있다. 고액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전석 매진되는 공연들은 그 무대가 관객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메시지, 즉 새로운 희망과 진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런 무대공연물 이전에 그 무대 공연이 가능하게 만든 사회의 문화 또한 따져보기를 잊지 않는다. 아리랑 공연에 대해 남측의 일반적 반응이 무덤덤한 것은 이미 ‘대규모 관제 공연’의 일사불란함과 의식화된 참여의 본질을 잘 알고 있으며, 거기에서 아무런 희망이나 비전을 읽을 수 없었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자발적 동화의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야 


실학자들이 청나라에 가서 남들이야 청나라를 오랑캐나라라고 하든지 말든지, 그들의 문명을 배워야겠다고 자각했던 것은 누가 시켜서 했던 것이 아니다. 이규경이 『오주(五洲) 연문(衍文) 장전(長箋) 산고(散稿)』에서 「오랑캐의 풍속이 도리어 간편(簡便)한 데 대한 변증설」 대목에 “어떤 이는 오랑캐의 풍속은 새나 짐승과 다름없다 하는데, 이는 알지 못하고 살피지 못하여 그들의 장점은 버리고 단점만 말한 것이다.”라고 지적한 시각이야 말로, 문명의식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청나라 만주족과 일본인들의 음식 문화 및 기타 생활 습속에 대해 그 허례허식 없는 검소함과 간편함, 질서정연함을 예로 들어 감탄하고 있다. 이런 식이다.


“왜인(倭人)은 섬나라의 오랑캐이기는 하나 나라를 세운 지 3천여 년이 되었고 또 한 성(姓)이 서로 계승해 왔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의복(衣服)과 기물(器物)은 간편한 것을 위주로 하고, 끼니마다 드는 음식은 아무리 노동자라도 절대로 실컷 먹어대는 예가 없다. 또 우리나라처럼 아침저녁으로 하인들이 식사하라고 전갈하는 예가 없고 배가 고프면 경우에 따라서는 몇 닢의 동전(銅錢)으로 유병(油餠) 한 조각, 혹은 군고구마 두서너 개를 사서 요기(療飢)한다.”


뿐만 아니라, 고관이나 고위층이라 하여 특권이나 치외법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그 법 앞의 평등함에 대해 대단히 감탄한다. “대저 그 나라에는 임금이나 각 고을의 태수가 쓰고 있는 정책이 일체 군법(軍法)에 의거한 것이었고 또 백성들도 늘 여기에 견습(見習)되어 일체 군법대로 따르고 있으니, 이 어찌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이다.


문명의식이란 것을 아주 쉽게 한마디로 풀어본다면, ‘세상에서 훌륭해 보이는 것을 내가 체득하여 공유하려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 동일시의 욕구를 심을 수 있는 생활방식이 고급한 문화를 낳고, 그 일부가 무대에 올라가서 타문화권에도 자발적 동화의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선진한 문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공연은 ‘문명의식의 코드’에 대해, 그리고 ‘문명의식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을 정리하게 만든다.


아무리 사회적 지탄을 받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에게서도 쓸모 있는 것을 찾아 관심을 드러내는 누리꾼이나, 아무리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대상에게서도 배울 점을 찾아서 감탄하며 비전을 발견했던 실학자들의 시선에는 일말의 공통분모가 있다. 이 문제를 역으로 생각하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만 만드는 상업적 한류문화상품의 문제도 보일 것이다. 문화는 생활의 건강한 아름다움이 토대가 되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글쓴이 / 이지양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 논문:「연암 박지원의 생활 특징과 문화예술사상」(『한국한문학연구』36집, 2005)외 다수

· 저서 : 『홀로 앉아 금을 타고』, 샘터사, 2007

· 번역서(공역): 『역주 매천야록(상.하)』, 문학과지성사, 2005

                    『역주 이옥전집』, 소명출판, 2001

                     『조선후기 문집의 음악사료』,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0

                    『조희룡전집』, 한길아트, 1998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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