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새만금
고 미 숙(연구공간 수유+너머)
인성과 물성은 같은가? 다른가? 18세기 노론계열 지식인들 사이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불꽃튀는 논쟁이 벌어졌다. 같다고 볼 경우,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근본적 위계는 사라진다. 다르다고 볼 경우,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설정된다. 주지하듯, 담헌과 연암은 ‘동(同)’론의 대표주자였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나 만물은 균등하다”
담헌은 <의산문답>에서 말한다. “사람에게 오륜(五倫)이나 오사(五事)가 있듯이, 동물에게는 무리지어 다니면서 함께 먹이를 취하는 것이 예의이고, 식물에게는 군락을 지어서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의다. 고로, 사람 입장에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이 천하지만, 만물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나 만물은 균등하다.”
연암이 <호질>에서 펼치는 논지는 한층 더 과격하다. <호질>은 말 그대로 허울좋은 명분을 앞세워 동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인간문명에 대한 맹렬한 질타다. “네 놈들은 걸핏하면 하늘을 끌어들이지만, 하늘이 명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든 사람이든 다 동일한 존재다. 인(仁)의 견지에서 논하자면, 범과 메뚜기·누에·개미와 사람이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또 선악을 척도로 삼아 따져보자면, 벌과 개미의 집,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제멋대로 약탈하는 놈은 천하의 큰 도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인성이 물성만 못하다’는 게 연암의 결론이다. 물론 이 신랄한 논변도 20세기 이래 자행된 근대문명의 폭력적 진군 앞에서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치열하게 논의될 가치가 있다.
작년 5월, 나는 부안의 계화도 갯벌에서 이 논쟁의 생생한 현장을 목도하였다. 2006년 3월, 대법원의 판결로 수년간을 끌어오던 새만금 방조제 끝막이 공사가 마침내 치러지고 말았다. 그 즈음, 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후배들과 ‘새만금에서 대추리까지’ 도보행진 중이었다. 행진 이틀째, 계화도 갯벌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전신을 휘감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게 펼쳐진, 그 드넓은 갯벌이 수천만, 아니 수억 개가 될지 모를 조개와 백합, 갯지렁이들의 주검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때 거기’는 홀로코스트, 아니 천지가 함께 흐느끼는 통곡의 매트릭스였다.
인간을 위해서는 자연을 마음껏 유린해도 좋은가?
새만금 간척은 20세기 한국 근대문명의 폭주를 한눈에 보여주는 사건이다. 부국강병이라는 테제하에 천지만물과의 연대를 가차없이 단절해버리고, ‘산을 헐어 바다를 메우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공사를 개발과 진보라는 미명으로 호도했다는 점에서. 어디 그뿐인가. 역사상 처음으로 4대 종교 지도자들이 65일 동안 ‘세 번 걷고 한번 절하는’, 목숨을 건 순례를 감행했음에도 ‘우리들의 참여정부’는 결코 이 맹목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놀라워라! 이 지독한 뻔뻔함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휴머니즘’, 곧 인간중심주의이다. 휴머니즘이란 자연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을 마음껏 유린해도 좋다는 비정한 착취의 논리에 다름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인성과 물성의 간극을 강변했던 ‘이론(異論)’의 극단적 변주에 해당하는 셈이다.
하기야 20세기 실학담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한 연암과 담헌의 논리조차도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라는 논리하에 근대적 장으로 포획하곤 했다. 연암과 담헌의 사유를 근대성의 장에서 해방시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사유는 중세 외부를 향했지만, 그 외부성은 결코 근대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근대문명의 심연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 장을 펼쳐준다. 만약 담헌과 연암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인물성동이론’에 가담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동(同)’론의 입장을 가차없이 버릴 것이다. “인성과 물성은 결단코 같지 않다! 지구상에 대체 어떤 종이 이토록 잔혹하고 이토록 무지할 수 있을까.”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인성’을 버려야 하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 이것이 새만금이 우리에게 준 ‘시대적 화두’다.
글쓴이 / 고미숙
· 고전평론가
· <연구공간 수유+너머 www.transs.pe.kr> 연구원
· 저서 :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2007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2004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