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제4부) 윤동주 교토 시비편 1
일제강점기 유학청년 윤동주와 정지용을 동지사대학에서 만나다
▲ 교토 동지사대학 이마데가와 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 김영조
교토 일정 중 하루를 잡아 우리 일행(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은 교토 명문 사립대학 중 하나인 동지사(同志社,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今出川) 교정을 찾았다. 이 대학이 한국에서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에서 윤동주시인이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문 수위실에서 한국말로 “윤동주”라고만 해도 눈치 빠른 수위 아저씨는 동지사 교정 안내서를 꺼내 친절히 빨간 펜으로 시비(詩碑) 위치를 가르쳐준다. 그만큼 요즈음은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조국을 배반하고 친일의 길을 걸었다. 특히 상당수 문학인이 황국신민을 외치며 참전을 부추기는 시와 소설로 동포를 짓밟고 자신의 안녕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 시절에도 조국에 대한 사랑을 꺾지 않고 시로서 항거한 시인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우리에게 친근한 윤동주가 바로 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동지사 대학 안의 작은 시비에는 이 시가 육필 원고와
일어 번역문으로 새겨져 있다.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했던 1941년 어느 날 조국을 잃은 슬픔을 달래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 윤동주 시인 ⓒ동지사대학
북간도에서 출생하여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
연희전문을 거쳐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동지사대학의 영문학부에 입학한 뒤 6달 만인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혐의를 받아 체포됐다가 옥중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 상태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윤동주는 일제가 전쟁에 광분한 나머지 인체 실험을 하고 있을 때여서 항간에는 인체실험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와 함께 체포돼 형무소에서 죽은 송몽규를 윤동주 아버지가 면회 갔을 때 송몽규는 그 두 사람이 같이 정체 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증언을 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만주 731부대와 소록도 나환자 갱생원에서 생체실험을 했던 일제가 일본 형무소에서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토록 애타게 염원하고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조국 광복을 반년 남겨 놓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한 청년 윤동주는 한 많은 타국 땅 하늘 아래에서 숨을 거두었다.
▲ 윤동주의 시가 올라있는 일본 교과서, 시비 건립 관련 신문 보도들 ⓒ 동지사대학
그 삶 자체가 하나의 하늘이요 별이었던 암흑기 시인 윤동주는 오늘도 동지사대 교정에 돌비석이 된 채 말없이 서 있다. 청운의 뜻을 펴지 못한 채 28세의 안타까운 나이를 불꽃처럼 살다간 그는 불후의 명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생전에 그의 손으로 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일본의 검정교과서에 실려 그를 죽어가게 한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서 참회의 눈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의 첫 시집은 하숙집 친구 정병욱이 동생 윤일주와 함께 사후인 1948년 정음사에서 펴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지하철 이마데가와역에서 내려 정문으로 나있는 길 다란 돌담길을 걸으며 우리 일행은 청년 윤동주를 떠올렸다. 그도 이 길을 수 없이 걸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작고 아담한 정문을 지나 교정 안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녹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쪽으로 동지사대학 학생들이 세워둔 사람 키보다 더 큰 가지각색의 동아리 활동을 알리는 패널들이 줄지어져 있다.
▲ 동지사대학 이마데가와 교정의 동아리 활동을 알리는 패널들 ⓒ 김영조
정치성 구호와 아프리카 난민 돕기까지 다양한 그들의 목소리를 읽어내면서도 마음은 윤동주에게로 가 있다. 윤동주가 이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도 이런 동아리 활동들이 있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였으므로 지금 이 패널들의 그림은 전쟁터에 어서 나가 싸워 대일본국을 만들자는 구호로 가득 찼을 것이고 매일 이 구호들을 바라다봐야 하는 애국 청년 윤동주의 마음은 타들어 갔을 것이다.
“아! 신이시여! 나의 조국 조선을 이들의 검은 손아귀에서 해방 시켜주소서.” 이런 기원을 읊조리면서 그는 별이 스치우는 밤 가슴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겨울 추위에 옷깃을 여몄을 것이다.
캠퍼스에 들어서서도 우리는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말없이 수위 아저씨가 건네준 교정 안내문을 보며 시비를 찾아 걸었다. 명치 21년 곧 1888년에 세워진 동지사대학은 올해로 122년을 맞이하지만 교정 안의 붉은 벽돌 건물들은 관리를 잘한 탓인지 엊그제 지은 건물처럼 말쑥하다.
계명관, 신학관을 지나다 보면 정면에 클라크 기념관이 나오는데 이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십여 발자국을 가면 핼리스이화학관이 나온다. 이 건물과 예배당 건물 사이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 윤동주시인을 만난다는 설렘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시비를 놓치기 쉽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야 시비와 만날 수 있다.
▲ 동지사대학 이마데가와 교정 지도에서 윤동주 시비 찾기 ⓒ 김영조
까만 보령지방의 오석(烏石) 같은 대리석 시비 앞에 우리 일행이 섰을 때는 7월의 무더위가 한풀 가신 오후 시간이었다. 우리는 시비 앞에서 눈을 감고 조용히 묵념을 올렸다. 어디선가 일본말이 들려온다. 시비 바로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일본인 학생들의 이야기 소리였음에도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일제 암흑기 나라말과 글을 빼앗기고 강요에 의한 일본말을 배워야 했던 시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긴 채 일본 땅에 와서 고독하고 외로웠을 그리고 암담했을 청년 윤동주의 모습이 묵념을 올리는 우리 머리를 스쳐간다. 코끝이 찡해지는가 싶은데 일행 중 여성 몇 명이 흐느낀다. 어디 흐느낌뿐이랴! 통곡마저 하고 싶은 심정을!
우리의 무거운 마음을 위로할 겸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일행은 합창하듯 “별 헤는 밤을” 낭독했다. 이 시비가 세워지기 전까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신문, 언론에서 저항시인 윤동주를 대대적으로 보도해주는 등 많은 관심을 보인 끝에 1995년 2월 16일 모교인 동지사대학에 시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우리는 다짐하면서 동지사대학을 나와 윤동주 시인의 또 다른 시비가 있는 교토조형예술대학으로 향했다.
▲ 윤동주 하숙집이 있었던 교토조형예술대학에 세워진 시비, 왼쪽 빨간 줄 친 부분에
시비가 있고 오른쪽 줄 친 부분에 교토조형예술대학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 김영조
윤동주 시비는 동지사대학 말고도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高原) 교정 들머리에도 세워져 있다. 이곳은 그가 한때 하숙하던 곳인데 당시 건물이 헐리고 지금은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교정이 들어서 있다. 일본 대학은 한국 대학과 달리 교정이 한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건물들이 산재해 있는데 두 번째 윤동주 시비가 서 있는 곳을 찾아간 교토조형예술대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부 건물이 있는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교정에 시비가 있었다. 이 대학 안내실 여직원은 먼 곳에서 윤동주시인을 찾아온 정성이 갸륵하다고 여겼는지 본부 건물과 떨어진 곳에 있는 교정 약도를 꺼내 붉은 펜으로 그려주면서 친절한 모습을 보인다. 남의 나라 시인이지만 자기네 학교 근처에서 하숙했던 시인이 자랑스러운 듯 부드러운 말씨가 여행에 지친 우리 일행을 위로해준다.
교토조형예술대학 본부 건물의 깎아지른 듯한 계단을 내려와 길 건너편 교정을 가려고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또다시 시인을 그려본다. 신호등 넘어 왕복 2차선 도로가 뚫려 있고 길옆에는 주택가와 상점이 나란히 있는 저 거리는 윤동주시인이 머물던 시기인 1940년대는 허름한 집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하숙을 했다. “가난한 유학생 방의 뚫린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으스스한 한기를 어떻게 견뎌 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신호가 바뀌고 한껏 치장을 한 예술대학 학생들이 우르르 건너간다.
우리도 그 사이를 비집고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옛 하숙집터에 세워진 시비로 발길을 옮겼다. 일행은 교토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윤동주 시비 앞에서 또다시 마음을 모아 묵념했다. 윤동주는 그가 꿈에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 그곳에서 달려온 후배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어두운 눈물을 거두고 함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시인이 그리던 아름다운 고국 대한민국을 살찌우고 두 번 다시 외세에 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시비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우리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인은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다보고 있었다.
▲ 1943년 여름 동지사대학 동기들과 우지(宇治) 강변에서의 한때
앞줄 2번째 학생모 차림이 윤동주 ⓒ 동지사대학
<윤동주 해적이(연보)>
1917 북간도 명동촌 출생
1932 용정 은진중학교 입학
1935 평양 숭실중학교로 옮김
1938 숭실중학교 폐교후 광명학원 중학부 졸업
1941 연희전문 문과 졸업
자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기념으로 간행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함
1942 일본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동지사대학 영문과 편입
1943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
1945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1946 유작 <쉽게 씌어진 시>가 《경향신문》에 발표
1955 유고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간행
글쓴이
*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59yoon@hanmail.net)
* 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sol119@empal.com)
* 이 글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나 참고될 만한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위 누리편지로
연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글이 필요하신 분은 꼭 미리 알려주십시오.
<다음은 제2편 “동지사대학 윤동주 시비 옆에 나란히 선 정지용시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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