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둘 상식

[스크랩] 미국은 한국을 일본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문근영 2016. 5. 8. 09:49

 

미국은 한국을 일본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한글날 기념 학술대회 열려

   

  

 

  

                         ▲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한글날 기념 학술대회 모습     ? 김영조

 

 

"미국은 테프트-가쓰라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게 하더니만 해방 뒤에도 역시 같은 생각 곧 "케년 설계도”로 우리를 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우리는 미국에 현재도 “케년 설계도”를 머릿속에 넣고 우리를 대하는지 분명히 물어야 한다."라고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정현기 회장은 강조한다.

 

이 주장은 563돌 한글날을 맞아 지난 10월 9일 늦은 1시부터 “우리말로 학문하기 위한 조건들”이란 주제를 내걸고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 학술대회” 중 “갇힘과 가둠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한 발표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세상에 가두는 자들과 갇히는 이들이 있다며, 최인훈 장편소설 ≪광장≫과 정경모의 글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를 인용하여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조직폭력배에도 순응해서는 안 되며, 이웃 사람이나 이웃 나라 사람들의 눈빛을 잘 살펴 읽어야 하는 것은 물론 가장 가까이서 우리를 묶어 가두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눈을 바로 떠 지켜볼 것을 주문한다.

   

 

  

▲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한글날 기념 학술대회에서 “갇힘과 가둠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발표하는 정현기 교수(가운데)  ?김영조

 

 

그밖에 이날 나온 주제발표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의 “퇴계학의 바탕으로서 한국말”과 경희대 한학성 교수의 “우리나라 외국어 교육의 전통과 19세기 말 유럽의 개혁교수법”이었다.

 

먼저 최봉영 교수는 발표에서 “퇴계는 한국말로 한문을 공부해 주자를 넘었다. 곧 퇴계가 주자를 넘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으로서 주자를 공부했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품을 벌이고 다른 것들을 받아들여 품어주는 것은 <어질다>이며, 모를 세우고 곧장 나아가면서 다른 것들을 밀치고 부수는 것”이라는 색다른 얘기도 했다.

 

한학성 교수는우리나라의 전통적 외국어교수법은 19세기 말 유럽의 개혁교수법보다 사오백 년 앞선 면모를 보였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조선시대에 외국어 교재 곧 ≪노걸대≫, ≪박통사≫ 등의 교재가 있었으며. 사역원이나 승문원에서 전문적인 외국어 교육을 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1894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갑오경장으로 사역원을 폐지하고, 강제합병 직후인 1911년 외국어학교를 폐지하면서 무너졌다고 안타까워했다.

   

 

  

▲ 우리말로 학문하기 학술대회에서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가

“퇴계학의 바탕으로서 한국말”이란 제목으로 발표하고 있다.(가운데)  ? 김영조

 

  

  

▲ “우리나라 외국어 교육의 전통과 19세기 말 유럽의 개혁교수법”를 발표하는

경희대 한학성 교수(가운데)  ? 김영조

 

 

이 밖에도 정대현 전 이화여대 교수의 “‘우리 마누라’ 문법”, 임재해 안동대 교수의 “우리말 본풀이 역사인식과 본풀이 사관의 수립", 한규석(전남대)·최상진(중앙대) 교수의 ”왜 마음인가“, 인은주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기다림에 관한 짧은 생각 몇”, 구연상 외국어대 교수의 “서술과 상상력”이 이어졌다.

 

이날 학술대회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학술대회를 꼭 한글날 한 점은 아쉬웠다. 많은 학술대회가 이날 몰려 있어 더 보고 싶은 학술대회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발표자 가운데는 “우리말로 학문하기”에 잘 맞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한자 또는 영어 그리고 영어 문장의 남용도 보였고, 우리말로 풀어쓰려는 노력이 소홀한 글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날 학술대회는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끊임없이 이루어나가려는 열띤 토론으로 청중의 큰 손뼉을 받았다. 어쩌면 학문 세계의 주변인으로 머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주변인이 아닌 세상을 이끌어 내는 중심이 되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 않을까?

 

 

출처 :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글쓴이 : 김영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