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오르는 종족, 인디언들의 가르침
인디언 마을에서
근 20년 만에 다시 미국에 온 것은 오로지 인디언을 다시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20년 전이나 후나, 아니 어쩌면 200년 전이나 후나 거의 변함이 없다. 그동안 한국에서 읽은, 인디언의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삶에 대한 거의 환상적일 정도의 이야기들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4명 중 3명이 실업자고 반 이상이 빈곤선 아래에서 살면서 평균소득, 평균수명, 취학률, 주택환경 등이 모두 미국인 평균을 크게 밑돈다. 반면 차사고 사망률, 자살률, 발병률, 알코올 중독률 등은 모두 평균을 웃돈다. 이 모든 것이 200년, 아니 백인 침략 이후 500년의 결과임은 물론이다.
인디언이란 말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인도라고 착각해 붙인 잘못된 이름이지만, 가끔 인디언 마을이 인도라는 착각을 한다. 시간관념이 없는 점이 특히 그렇다. 이제는 없어진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처럼 인디언 타임이라는 말이 아직 있을 정도다. 인도에서나 인디언 마을에서나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림에 익숙해야 탈이 없다. 그런 삶을 그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시간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인디언이 사는 집도 무질서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한데 그것도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백인 가정만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도 흔히 보는 정리정돈이나 소독약 냄새가 여기에는 없다. 내가 들어가 본 인디언 집의 무질서는 옛날 시골의 사랑방이나 지금의 내 방과 유사했다.
-가난하지만 관용을 베푸는 삶-
그런 실내를 아이들이 흙발로 뛰어다녀도 어른들은 꾸중을 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체벌이 금지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그들의 으뜸 신조임을 알았다. 부처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말이 인디언 삶의 핵심이다. 개인은 집단에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유를 갖는다. 개인은 원하면 언제나 집단에서 빠져나갈 수 있고 언제나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집단은 개인을 그 울타리 안에 포함시키거나 배제시킬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특정한 생각과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
물론 그들에게도 협조하면서 산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조화는 강요와 통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질감과 사랑에서 온다. 이런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완화하는 장치가 가족이고 그 핵심이 노인인데, 노인을 비롯한 어른들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노인이 자연스럽게 추장 노릇을 하지만 추장이란 말은 생긴지 500년밖에 안된다. 즉 대장 또는 책임자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온 말이지 인디언 말이 아니다. 추장을 선거로 뽑는 제도도 백인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지 인디언 본래의 제도가 아니다.
그런 추장은 존경을 받는 대상일 뿐이지 어떤 권력이나 이권도 갖지 않는다. 물론 누구에게도 인디언은 아첨하지 않는다. 특히 학력이나 경력, 경제적 사회적 지위 따위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령 내가 교수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전혀 의식되지 않고, 관료라는 것도 중시하지 않는다. 직함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가 중요하다. 인디언이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관용이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의 소위 톨레랑스와 달리 정신과 물질 모두에 대한 관용을 뜻한다. 특히 자신에게 소중한 식품을 남에게 기꺼이 주는 관용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기 집에 온 손님이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는 것은 자신을 인색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모욕이다. 물론 너무나 빈약한 냉장고였지만 그것을 열어본 때만큼 그들이 흐뭇해 한 적이 없고, “친족”이라면서 나를 힘껏 안아준 적도 없다.
-자유 누리며 나름의 행복 찾아-
인디언은 기도나 연설의 마지막에 언제나 “모든 것이 나의 친족”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친족이란 혈연으로 맺어진 것이지만 인디언의 친족은 모든 생명과 자연, 그것도 조상을 포함한 모든 역사의 연쇄를 말한다. 그들에게도 창조신화는 있으나 이는 시간을 통하여 흐르는 서양의 역사관처럼 진보의 관념 위에 있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 모두 혈연이고 부모도 여럿이다. 즉 우리가 숙부모나 이부모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모두 부모고, 그 형제도 모두 친형제다. 이런 사회에서 고아나 거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침략 당하지 않는 한 전쟁도 없다. 그 인디언 마을에서는 시공을 넘어 행복했지만, 그곳을 떠나 미국이란 현실에서 다시 본 그들의 비참을 잊을 수 없다.
〈박홍규/영남대교수·법학〉
인디언이란 말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인도라고 착각해 붙인 잘못된 이름이지만, 가끔 인디언 마을이 인도라는 착각을 한다. 시간관념이 없는 점이 특히 그렇다. 이제는 없어진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처럼 인디언 타임이라는 말이 아직 있을 정도다. 인도에서나 인디언 마을에서나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림에 익숙해야 탈이 없다. 그런 삶을 그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시간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인디언이 사는 집도 무질서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한데 그것도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백인 가정만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도 흔히 보는 정리정돈이나 소독약 냄새가 여기에는 없다. 내가 들어가 본 인디언 집의 무질서는 옛날 시골의 사랑방이나 지금의 내 방과 유사했다.
-가난하지만 관용을 베푸는 삶-
그런 실내를 아이들이 흙발로 뛰어다녀도 어른들은 꾸중을 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체벌이 금지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그들의 으뜸 신조임을 알았다. 부처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말이 인디언 삶의 핵심이다. 개인은 집단에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유를 갖는다. 개인은 원하면 언제나 집단에서 빠져나갈 수 있고 언제나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집단은 개인을 그 울타리 안에 포함시키거나 배제시킬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특정한 생각과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
물론 그들에게도 협조하면서 산다는 것이 중요하지만, 조화는 강요와 통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질감과 사랑에서 온다. 이런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완화하는 장치가 가족이고 그 핵심이 노인인데, 노인을 비롯한 어른들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노인이 자연스럽게 추장 노릇을 하지만 추장이란 말은 생긴지 500년밖에 안된다. 즉 대장 또는 책임자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온 말이지 인디언 말이 아니다. 추장을 선거로 뽑는 제도도 백인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지 인디언 본래의 제도가 아니다.
그런 추장은 존경을 받는 대상일 뿐이지 어떤 권력이나 이권도 갖지 않는다. 물론 누구에게도 인디언은 아첨하지 않는다. 특히 학력이나 경력, 경제적 사회적 지위 따위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령 내가 교수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전혀 의식되지 않고, 관료라는 것도 중시하지 않는다. 직함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가 중요하다. 인디언이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관용이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의 소위 톨레랑스와 달리 정신과 물질 모두에 대한 관용을 뜻한다. 특히 자신에게 소중한 식품을 남에게 기꺼이 주는 관용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기 집에 온 손님이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는 것은 자신을 인색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모욕이다. 물론 너무나 빈약한 냉장고였지만 그것을 열어본 때만큼 그들이 흐뭇해 한 적이 없고, “친족”이라면서 나를 힘껏 안아준 적도 없다.
-자유 누리며 나름의 행복 찾아-
인디언은 기도나 연설의 마지막에 언제나 “모든 것이 나의 친족”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친족이란 혈연으로 맺어진 것이지만 인디언의 친족은 모든 생명과 자연, 그것도 조상을 포함한 모든 역사의 연쇄를 말한다. 그들에게도 창조신화는 있으나 이는 시간을 통하여 흐르는 서양의 역사관처럼 진보의 관념 위에 있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 모두 혈연이고 부모도 여럿이다. 즉 우리가 숙부모나 이부모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모두 부모고, 그 형제도 모두 친형제다. 이런 사회에서 고아나 거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침략 당하지 않는 한 전쟁도 없다. 그 인디언 마을에서는 시공을 넘어 행복했지만, 그곳을 떠나 미국이란 현실에서 다시 본 그들의 비참을 잊을 수 없다.
〈박홍규/영남대교수·법학〉
2008년 1월 10일 (목) 경향신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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