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식물성으로의 도피 / 윤의섭

문근영 2016. 3. 24. 01:05

식물성으로의 도피

 

   윤의섭

 

 

 

마주보고 서 있는 게 십 년째다

벚나무와 플라타너스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산다

플라타너스가 구름에게서 전송받은 빗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면

무참한 잔해가 길바닥에 쏟아졌다

썩은 나뭇잎 마스카라 번진 빗물 슬쩍 유산한 삭정이

아직은 半人半樹지만

벚나무가 보기에 저만한 위장술도 없다

 

벚나무가 된 이후로 벚나무는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봄이면 멀리서 불어온 바람의 옷자락에서 낯익은 살내를 맡지만

동시에 스며든 시취로 벚나무는 부인에 부인을 거듭하며 소름이 돋았다

몹쓸 꽃이 돋았다 해마다 돋았다

바람은 늘 같은 곳을 여행하였다

프로메테우스보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벚나무는 벚나무로 산다

 

벚나무와 플라타너스는 그렇게 말없이 쳐다보며 서있다

식물의 시간으로는 몇 세기를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둘러보면 다른 나무들도 묵묵히 기다리며 서 있다

늘어선 아파트들도 눈을 껌벅이며 기다린다

도시의 모든 건물이 마주보며 등지며 기다린다

 

오래 전 시작된 저 엑소더스를 보라

非人間만이 살아남을 거라는 소문은 非人間 사이에만 전해졌다

사람살이는 무정하게 외면되었고

벚나무와 플라타너스는 기를 쓰고 벚나무와 플라타너스인 척한다

끔찍한 초여름의 풍경이다

 

 

 

                       —《시와 세계》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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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섭 / 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 아주대학교 국문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1992년 〈경인일보〉신춘문예와 1994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마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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