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정월에 신서파(信西派), 즉 서양학문에 취할 점이 있는 부분은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당시의 진보적인 학자들의 훌륭한 후원자이던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세상을 뜨면서, 그들의 반대파들인 공서파(攻西派)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다산일파들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운 화란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예감하면서 다산은 고향으로 낙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태어난 마을인 소내[苕川]로 자주 오고가며 기회를 보다가 마침내 1800년 초봄에 정말로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그때 다산은 소박한 소원을 하나 이루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삶이지만 낭만적이고 운치가 있으며 마음만은 넉넉한 삶을 설계하였으니, 강물위에 배를 띄우고 아내와 어린 자식과 함께 강물위의 배에서 생활하는 낚시꾼의 삶을 꿈꾸었습니다.
“나는 작은 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배 안에 고기그물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추어놓고, 또 술과 잔과 소반 같은 여러 가지 식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며, 방 한 간을 만들어 온돌을 놓고 싶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집을 지키게 하고, 늙은 아내와 어린 아이 및 심부름하는 아이 하나를 이끌고 물에 떠다니면서 살아가는 배로 수종산과 소수(苕水)사이를 왕래하면서 오늘은 어떤 곳에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어떤 곳에서 낚시질하며, 그 다음날은 또 어떤 곳의 여울에서 고기를 잡는다. 바람을 맞으면서 물위에서 잠을 자고 마치 물결에 떠다니는 오리들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때때로 짤막한 시가(詩歌)를 지어 스스로 팔자가 사나워 불우하게 된 정회(情懷)를 읊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얼마나 낭만적인가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세상에 버림받고 살아가는 사람의 쓰라리고 아픈 마음이 처절하게 담겨있습니다. 끝내 그해 여름인 1800년 6월에 정조 임금까지 세상을 떠나고 다산은 소원도 이룩하지 못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긴긴 유배생활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낭만과 서러움이 함께 서린 다산의 소원. 그가 지은 「소상연파조수지가기(苕上煙波釣
之家記)」에 자세한데, ‘소내강의 안개 속에서 낚시질하는 이의 집’이라는 제목의 글이 바로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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