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한창이던 광복절 무렵, 우리는 다산의 둘째 형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 1758~1816)의 유배지 흑산도의 사리(沙里)라는 마을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정약전이 유배살 때 연구하고 학동들을 가르쳤던 사촌서실(沙村書室)이 있는데, 그곳을 설명하는 간판이 집 입구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손암 정약전이 천주교 신자여서 유배살이를 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잘못된 기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산은 세상에서의 유일한 지기(知己)가 자기 중형인 정약전이었다고 여러 곳에서 거듭 강조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다산이 손암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았고, 손암이 또 누구보다도 다산을 잘 알았기에 그들은 서로 ‘동포형제지기(同胞兄弟知己)’라고 분명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지기라는 말에,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산은 자기 자신의 천주교 문제에 대해, 처음에는 ‘흔연열모(欣然悅慕)’ 했으나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문제와 나라에서 금함이 심해져서 ‘마침내 마음을 끊었다(遂絶意)’라고 명확히 말하여 천주교에서 손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형 정약전의 일대기인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도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서적을 보고는 처음에는 흔연스럽게 그쪽으로 기울어버렸었다. 그러나 그때는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말이 없었지만 진산사건이 발생한 신해(辛亥:1791)년 겨울 이후로는 나라에서 금함이 더욱 엄해졌었다. 그래서 마침내 한계가 구별되고 말았다”(見實義七克等數卷始欣然傾嚮 而此時無廢祭之說 自辛亥冬以後 邦禁益嚴 而畦畛遂別)라고 분명하게 천주교를 종교로 신앙하는 일에서는 마음과 손을 떼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산과 손암은 다산의 기록을 통해 천주교와 결별하였으나 정치적 모함에 걸려 한때 천주교와 관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그 모진 유배살이를 했는데, 그런 명확한 진실이 있는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천주교 신자라고 한다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요.
손암이 세상을 떠난 7년 뒤에 기록한, 다산의 글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비통한 손암의 묘지명은 참으로 명문장인데다 가슴을 적시게 하는 글입니다. 그들 형제의 뜨거운 애정이 서려 있고 대학자 손암의 인품과 학문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도 참으로 정확하게 기록된 글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접하면서 다산의 학문이 그 범위와 크기가 넓고 높아진 것이야 사실이지만, 본인이 아니라는 신자 문제는 이제쯤 종결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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