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신춘문예 유감
- 한국일보 '시 부문'의 경우 / 윤창식
신춘문예는 문학 지망생들에게는 매년 앓는 열병과도 같다고 한다. 그 신열들을 숱하게 겪고 마침내 당선된, 신춘문예 출신 작가들이 한국 문단을 풍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본인도 어느 지방신문의 소설 부문 신춘문예에 딱 한 번 응모한 적이 있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다.
신춘문예의 심사는 각 신문사마다, 그리고 매년 바뀌는 심사위원들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신인다운 발랄함과 실험성'을 그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는 곧 신인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기성 문인을 흉내 내거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작품을 걸러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심사기준일 것이다.
신춘문예 속성 상 이와 같은 관점에서 수상자를 결정해야 하는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문학을 지나치게 ‘실험성’이라는 잣대로 접근하거나 ‘글을 통한 사람 사이의 소통의 도구’가 곧 문학이라는 점이 도외시된다면 자칫 신춘문예 행사가 ‘그들만의 리그’가 될 위험성도 있다고 본다.
2009년도 힌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무럭무럭 구덩이>(이우성)가 이 경우가 아닌가 여겨진다. 한 마디로 어렵다. 매우 쉬운 시어를 동원하고 있지만,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단숨에 혹은 정독으로 여러 번 읽어보았으나 가족 간의 소통부재 내지 시적화자의 사회와의 불화(不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감만 잡힐 뿐이다(이 해석도 맞는지 모름). 도무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 시가 과연 일반 독자에게 얼마만한 문학적 에스프리(esprit)를 불러일으킬 지 의문이다. 무릇 어떤 문학작품이든 그것이 일반 독자의 가슴에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작가 자신만의 지적(知的) 유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 아닐까?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 <무럭무럭 구덩이> 중
언뜻 보면 ‘학습지진아’가 아무렇게 갈겨쓴 일기장 한 토막 같기도 하다(시인들은 모두 ‘정신증 환자’ 같다고 말한 평자도 있다.- "개미가 지구를 집어던진다" 나). 시작(詩作)이라는 힘든 작업에 들인 시간의 다과(多寡)를 가지고 작품의 우수성이 매겨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당선자 스스로 하루 만에 단숨에 써내려간 시라고 당선소감에서 밝히고 있는데, 심사평은 “이우성의 시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 목소리도 힘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다”고 적고 있다. 상상력이 ‘희귀하다’는 지적에는 일견 동의할 수 있으나 대체 속도감은 무어며 리듬감이 어쨌다는 건가?(물론 감각은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시란 본래 운율을 생명으로 하는 문학이니 만큼 리듬감도 속도감도 신선함도 다 좋다. 하지만, 모든 글은 주제로 통한다는데 이 시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그 정체가 모호하다(나만 그런가?).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이 시행들은 이 시의 도입부로서 여러 복선을 시행 속에 깔면서 비교적 무난한 목소리로 전개되고 있는데, 시적화자는 자기만의 구덩이를 파놓고 절대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동시에 ‘성장통’을 앓아가는 듯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구덩이’가 ‘모자’로 변신하는 장면은 그 상상력은 뛰어난지 몰라도 시인의 고뇌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마술가가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검은 모자를 뒤집자 순간 비둘기가 나온다는 식처럼 황당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이서 심사평은 그걸 두고 ‘속도감’ 운운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관객더러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말인가.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조사(助辭) 하나로 그 의미 빛깔이 달라질 정도로 특히 시에서는 시어 선택이 중요하다. ‘구덩이’는 본래 시각적으로 어둑신하면서 조금은 음산한 유폐적(幽閉的) 이미저리를 띄고 있는데,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 진 어머니는 어느새 퇴장하고 부엌이라는 공간에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은 아버지가 ‘느닷없이’ 나타나 구덩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았다니 이게 시적 리얼리티(시에서도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리얼리티가 무시될 수는 없다)가 있긴 하는가?
리얼리티 문제는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라는 구절에서도 눈에 띈다. 대등접속사 ‘과’에 의해서 ‘중력’과 ‘월요일’의 등위적 연결은 무난해 보이지만, 이는 일반적인 대중들 즉, 월요일에는 상당한 중압감을 안고 집을 나서야 하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일 터인 즉, 이 시의 시적 화자하고는 상당한 정도로 상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자는 학생신분으로 나오며 아직은 사회적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시적 화자는 구덩이를 땅에 다시 묻음으로써 무럭무럭 자라나는 정신의 성숙성을 보여주면서 결말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대목은 이 시가 그나마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매우 성공적인 구절로 보인다(그러나, 이 구절이 KBS ‘개그컨서트’의 어느 코너 버전임을 알면 실망스럽다: 팔이 짧은 후배에게 물뿌리개로 팔에 물을 뿌리며 하는 말: “니 팔이 빨리 자라야 나랑 놀 텐데...” 식이다).
어렵게 읽히는 시가 반드시 좋은 시가 아니듯이, 쉽게 읽힌다고 반드시 좋은 시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아무리 좋은 시라도(또는 신춘문예 심사자들이 그렇게 선정했더라도) 특정한 몇 몇 뛰어난 시 감상자들을 제외하고 일반 문학애호가들의 문학적 아우라에 다가가지 못한다면 좋은 시라고 볼 수 없다. 노래방 인기곡 순위에서 그이의 노래를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데 ‘대중 가수’ 서태지를 상당수의 음악평론가들이 한국 최고의 뮤지션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듯이. 혹자는 ‘시의 대중화’를 주장하는 것이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시의 대중화든 특정 문학계층에의 특화(特化)든 문학일반은 막힌 부분을 언술로 소통시켜주어야 하는 사명에 투철했으면 한다. 제발 좀 쉬우면서도 울림이 큰 시를 써 달라는 말씀이다.
*한국디지털조서관에서 옮겨옮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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