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애지>여름호 신인문학상 당선작- 초록방울 제사장 외 4편/ 안이삭

문근영 2014. 12. 19. 10:58

초록방울 제사장 외 4편


안이삭


오늘 바람의 말씀은
어느 쪽으로 강림하실까
사내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거나
손바닥을 들어 허공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다가
서쪽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대나무 제단을 높인다

바람의 말씀을
오류 없이 경청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대나무 제단의 각도
말씀은 언제 소나기처럼 후드득 쏟아질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땅에 내리지도 않고 스치듯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어서
사내의 자세는 치밀하고 경건하다

온몸을 햇빛으로 세례 받은 초록방울 제사장이
아슬아슬 대나무 제단 끝에 모셔진다
초록방울 제사장의 임무는
바람의 말씀을 번역하는 일
이쪽과 저쪽의 팽팽한 경계를 투명한 주먹으로 두드리는 일

바람을 숭배하는 것은 오래된 종교다
오래 전 도시를 떠난 아버지가
맑은 술 한잔을 부어놓고 말이 없던 그곳도
대나무 제단 앞이었다
바람의 말씀에 기대어 하얗게 늙어가던 아버지가
마침내 떠난 곳도 바람의 나라였다

차가운 강물에 손을 씻고
사내는 기다린다
바쳐질 제물은 오직
끈질긴 기다림뿐이었으므로


각종 구름 팝니다


그 가게
나도 가본 적 있다
멕시코 모자 타고 태평양 건너는 꿈을 꾼 날
참지 못하고 달려갔다
‘멕시코모자구름주세요’

그는 마법사였다
겨우 혼자 앉을 만큼 작은 가게에서
수천가지 구름을 관리하고 있었다
미친 여자가 와서 시간구름을 달라고 했을 때
딱 한번 이맛살을 찌푸린 것 말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님이 원하는 구름을 내어주었다
그마저 아무도 몰래  
더 위대한 마법사의 주소를 자세하게 일러주었다는 후문이다
내 앞의 여자는 대용량 밥솥구름을 원했고
그 앞의 남자는 빨간색 넥타이구름을 사갔다

포장지 안에
자기가 원하는 구름이 들어있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구름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멕시코 모자구름을 손에 넣는 순간
멕시코 모자 타고 태평양 건너
남미의 뜨거운 먼지바람에 휩싸인 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당연한 증상이다
얇은 포장지 안쪽에서
쉬지 않고 뭉쳤다가 풀어지는 구름의 움직임은 너무 뜨거워서
가끔 지울 수없는 화상으로 남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구름이 가까이 있었다는 증거

포장지를 뜯고 구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붙드는 일은
마법사의 책임이 아니다
어쩌다가 운 좋은 사람은
구름이 흩어지기 전에 붙잡기도 했다지만
너무 조심스러운 나머지 뒷일에 대해서는
소문으로조차 들리지 않는다

종로3가 지하도 계단 끝
오늘도 마법사는 주름 깊은 얼굴로
구름이 빠져나간 뒤 버려진 포장지들을 쓸어 담는다


구두        

                                                  
열두 켤레의 구두가 있다 열두 갈래의 길들이 순례의 방 앞에서 멈추었다 구면인 구두들이 과묵하게 아는 척을 한다 아침부터 끌려 다니던 길을 구두에게 맡기고 발은 기도중이다 길과 발 사이 종잇장 같이 위태로운 경계도 잠시 풀어지는지
구두들이 평화롭다, 쉬는 동안에도 하루 종일 품고 다니던 발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듯 발의 부피와 넓이를 고스란히 되새김질하고 있다 바람이 불면 덤덤한 흙먼지가 슬쩍 일어날 뿐 무관심하던 길들이
날카로운 가시나 사금파리를 감추고 부드러운 맨발을 노리고 있다는 것 구두는 안다 온몸으로 발을 싸안은 채 상처를 받아내면서
기다리는가
돌이킬 수 없는 일격!구두가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은 없다 기도를 끝낸 열두 쌍의 발을 안고 열두 켤레의 구두가 열두 갈래의 길로 흩어진다


통성명 


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야겠다
학의천 징검다리 건너다가
물억새 그늘 흔드는 작은 소요
반갑다, 피라미!

이쯤에서 가만히 서 있으마!
새끼손가락만한 몸 구석구석 새겨진 팽팽한 경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고
어미의 어미 또 그 어미의 어미가 가르쳤구나
물살을 타다가 거스르다가
반짝 햇빛에 반사되는 금빛 옆구리  

이 넓은 우주
홀씨 하얗게 날리는 봄날 오후
한 물고기와 한 사람이 바라보는 시간

나지막이
내 이름도 일러주었다



낚시


미끼 하나 던져주시라

그리고 조금 기다려주시라

본척만척 하다가도 끝내는

그 탐스런 미끼를 모른 척할 수 없을 것이니

목구멍에 삼킨 미늘은

죽음으로밖에 뱉을 수 없으므로

발버둥치기도 하겠지만

긴 시간

그냥 강이었다가

강 속의 물고기였다가

불덩이 같은 미끼를 물고서야

팽팽하게 세상에 맞서보는 것이니

비로소 내 이름으로 뜨겁게 살아보는 것이니

강가

등껍질이 벗겨지도록 서있는 나에게 누가

탐스런 미끼 하나 던져 주시라

-----{애지} 2011년 여름호



애지신인문학상 심사평
  ----안이삭 씨의 시에 대하여

  시는 말의 세계이며, 그 말들로 이루어진 이상세계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말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 말들의 운명에 의해서 소멸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대로, 시는 세계의 열림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이다. 한 편, 한 편의 시는 소우주이며, 우리는 그 시에 의해서 행복하게 살게 되어 있다.
  [초록방울 제사장] 외 9편을 응모해온 안이삭 씨의 시세계도 그 행복한 삶의 변주라고 할 수가 있다. 비록, 그는 희망과 절망을, 또는 행복과 불행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는 경계인(주변인)에 지나지 않지만, 그 경계인으로서의 숙명적인 곡예가 그 행복한 삶의 증거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다림의 미학’에 사로잡혀서 바람의 말씀을 번역하는 제사장([초록방울 제사장])이 그렇고, 시간구름, 모자구름, 넥타이구름, 밥솥구름을 팔고 있는 잡화점 가게의 주인([각종 구름 팝니다])이 그렇다. 또한, 예수의 열두 제자와도 같은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구두]의 등장인물들이 그렇고,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죄의식을 뛰어넘어서 피라미에 대한 생태주의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통성명]이 그렇다. 더욱이 오늘날의 모든 실업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는 [낚시}는 그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의 백미에 속하게 된다. 미끼(미늘)가 덫이 되고 독이 될지라도 그 미끼를 물어보고 싶다는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절망은, 하지만, 그러나 그 고통 속의 아름다운 꽃이 된다.
  모든 시인은 고통의 초상이고, 모든 시는 그 고통의 꽃이다.
  말의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고통으로 삶을 완성하는 자만이 영원불멸의 시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안이삭 씨의 앞날에 무한한 은총이 있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일동



당선소감

나는 꿈을 자주 꾸는데,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인지 대부분 허무맹랑한 것들이다. 지구의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삭막한 광야를 혼자 헤매기도 하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물빛의 바다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움직이는 별을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름대로 해몽도 하고 운세를 점쳐보기도 한다. 대게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희망으로 끝을 내지만.

  며칠 전 손님에게 밥을 지어서 대접하는 꿈을 꾸었다.
사실 밥을 짓는 꿈은 거의 시리즈물로 자주 등장하는 꿈이다. 손님이 기다리는데 음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린다거나, 겨우 지었는데 맛이 없다거나, 심지어 재료가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것까지…….
이 밥 짓는 꿈을 꾸고 나면 나는 꼭 시와 관련지어 해몽을 한다. 물론 전혀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내가 시를 대하는 태도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가 밥처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쓴 시가 이와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줄 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먹일 밥을 짓는 자세로 열심히 노력하겠다.

  이제 출발선에 섰다.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손잡아 주신 많은 분들, 특히 내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신 장석주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오랫동안 주춤거리기만 하는 모양을 참아준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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