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다산함께읽기] 다산과 수종사

문근영 2014. 6. 2. 00:12

 [다산함께읽기] 다산과 수종사
  글쓴이 : 동산     날짜 : 2010-03-31 15:46     조회 : 89    

이하는 자유게시판에 올린 독자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편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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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험한 비탈 끼고 우거져

절간으로 드는 길 분명찮은데

응달에는 묵은 눈 쌓여 있고

물가엔 아침 안개 떨어지누나

샘물은 돌구멍에 솟아오르고

종소리 숲 속에서 울려퍼지네

垂蘿夾危? / 不辨曹溪路/ 陰岡滯古雪/ 晴洲散朝霧/ 地漿湧嵌穴/ 鍾響出深樹

............수종사에 노닐며[游水鐘寺]

 

팔당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운길산 자락 수종사를 올라가 본 사람이면 이 시가 묘사하는 풍경을 충분히 알아차릴 것이다. 상당히 오르기 가파르다. 요즈음에는 시멘트 포장을 해서 길을 넓혀 놓아 옛 적 운치는 없지만 그래고 그 길을 올라가면 보람이 있다. 곧 시원한 바람에 띰을 씻으며 저 멀리 두물머리를 포함해 팔당호가 보여주는 한강의 합류지점의 멋진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니까.

15살의 다산 정약용은 집이 이 수종사에서 멀지 않았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줄기가 합쳐서 팔당으로 굽어드는 길목이었다. 거기서 운길산 수종사까지는 4킬로 남짓, 십리 길이기에 15살의 소년에게는 그저 신나는 하이킹일 터이다.

수종사(水鐘寺)는 물의 종이 있는 절이란 뜻이렸다. 전설이 있다. 1458년(세조 4) 세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가(이 때 온정리 온천을 들린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수두(二水頭: 두물머리, 곧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어 깊은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가 들려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게 하자, 뜻밖에도 바위굴이 있고, 그 굴속에는 18나한(羅漢)이 있었는데, 굴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왔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단다.

다산이 이 절을 자주 오른 것은, 공부하면서 힘든 몸을 추스르기 위함이겠지만 마땅히 주위에 올라갈 만한 곳으로는 이 수종사만한 곳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글재주가 많은 다산은 틈만 나면 이 수종사를 오르고 그 때마다 시를 남긴다.  

 

고운 햇살 옷깃에 비쳐 밝은데

옅은 구름 먼 밭에 둥실 떠가네

배 안에서 내리니 자유롭고요

골짝에 들어오니 한적하여라

麗景明衣袖/ 輕陰汎遠田 / 舍舟欣散漫 / 入谷愛幽娟

바위 풀 교묘하게 단장하였고

산중 버섯 우쭉우쭉 솟아나왔네

아스라한 강변에 어촌 나오고

위태로운 산머리 절간이 있네

巖卉施粧巧 / 山茸發怒專/ 漁村生逈渚/ 僧院寄危?

생각 맑아 외물이 가벼워지고

몸이 높아 신선이 멀지 않구나

애석한 건 동지의 길손이 없어

현묘한 도 탐구를 못함이라네

慮澹須輕物 / 身高未遠仙/ 惜無同志客/ 談討溯微玄

......... 봄날 수종사에 노닐며[春日游水鐘寺]

 

수종사는 그리 크지 않다. 요즈음에는 철근시멘트로 건물을 내어지어 제법 마당이 생겻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아마 요사채가 있었는 듯, 다산은 이곳에서 하루를 유하고는 그 기분을 이렇게 적는다.

 

감청색의 산빛이 높이 솟은 곳

누각이 이 산속에 붙여 있다네

문을 열면 강물이 들어오고요

바윗돌 곁에 닿아 서로 의지해

嶽色尖紺碧/ 樓容寄翠微 / 排門江正入 / 連?石相依

불교가 지난 옛날 전성하던 때

신선 구역 마침내 빛이 났는데

신라 때는 태자가 다녀갔고요

세조의 용의 깃발 거둥했었지

禪敎曾全盛/ 仙區遂發揮 / 新羅回鶴駕 / 世祖屈龍?

 

그런데 신라 때 왕자가 지나가고 세조대왕이 이 곳에서 묵던 유서깊은 이 절이 많이 퇴락한 것이 가슴에 아팠던 모양이다. 시는 계속 이어진다.

 

성쇠는 시대 따라 같지 않은데

구경꾼 근년에는 드물게 오네

푸른 덩굴 나그네 길을 덮었고

메마른 전나무에 적막한 절간

起廢從時異/ 游觀近歲稀 / 蒼藤迷客逕 / 枯檜寂禪扉

텅 빈 누각 북틀이 쓰러졌는데

긴 행랑엔 신틀이 누워 있구나

벽화는 비에 젖어 빛이 바랬고

솥무늬는 녹슬어 부풀었구나

虛閣頹鍾?/ 長廊臥?機 / 壁圖逾雨暗/ 釜篆潑苔肥

 

이 절이 다시 세워진 것이 조선 말기인 고종때라고 하니 다산이 이곳을 다닐 때만 해도 볼 품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옛날 왕이 들를 정도로 위세있던 이 절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나 고즈넉한 이 운치에 빠진 다산은 아주 이곳을 떠나기 싫다는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해질 녘이나 해뜰 때 이 절에서 한강이 합쳐지는 그곳에 비친 하늘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맑은 물은 하늘이 준 물처럼 흘러내리고

환한 꽃 저녁 비에 윤기가 난다

아련히 먼 곳까지 둘러보다가

눈길 돌려 향그런 초목 대하네

淨水流天液 / 濃花潤夕?/ 遊神連?杳 / 回?注芳菲

비탈 골짝 저물녘 서로 합하고

구름 노을 저 멀리 살짝 나누나

즐거움에 오히려 나 홀로 서서

한 밤 더 자며 아니 돌아가고파

厓谷昏相合 / 雲霞遠稍飛 / 怡怡猶獨立/ 信宿欲無歸

..............수종사에서 잠을 자며(宿水鐘寺)

 

15살이 되던 1776년 다산은 관례를 치르고 풍산 홍씨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결혼했다. 이때 부친인 진주공이 호조좌랑이 되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살림집을 세내어 서울 남촌에서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1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전국을 많이 다니게 되지만 수종사는 늘 그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듯 자주 그의 글에서 언급된다.

 

강언덕의 꾀꼬리 노래를

구불구불 노 저으며 듣노라네

수종사가 늘 바라보이고

석호정은 이미 지나왔구나

江岸黃?語 / ??倚櫂聽/ 猶瞻水鐘寺/ 已過石湖亭

...........골짝을 나와 무구와 함께[出峽同无咎]

 

혼자서 낚싯배를 연파에다 띄웠더니

수종사 용문산이 멀리서 흥 돋우네

버드나무 그늘 맑아 술통으로 옮겨 오고

개구리밥에 부는 바람 거문고 줄을 울린다

煙波獨汎釣魚船/ 水寺龍門興杳然/ 高柳陰淸移酒?/ 白?風動弄琴絃

천상에서 부르심을 처음으로 들었다가

한 쪽 멀리 도망나와 있는 몸임을 깨달았지

초야에 묻힌 몸을 님이 아직 기억하다니

해질 무렵 배를 돌리니 눈물 줄줄 흐르네

初聞恩召從天上/ 忽覺逋?遠日邊 / 流落尙爲明主憶/ 夕陽回棹淚漣漣

......... 거룻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집 애가 보내온 서신을 보고서 소명이 있음을 알고 다음 날 골짝을 내려와 삼가 작은 정성을 표하다[乘小舟捕魚 得兒書知有召命 明日下峽恭述微?]

                                                                                    

다산은 그를 총애하던 정조가 죽은 다음 해인 1801년,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신유교난(辛酉敎難)이 일어나면서 장기(長?)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옮겨 유배되었다. 그리고는 무려 1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목민심서를 완성한 1818년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이미 환갑에 거의 이른 다산은 몸이 많이 쇠약해서 예전처럼 마음 놓고 수종사를 올라갈 수 없었다.  

 

수종산의 저녁 빛은 찌푸린 얼굴 같은데

눈덮힌 나무의 얼음들이 초조히 사람 기다리어라

고개길에 까마귀 날 제 처음 말채찍 정돈하고

역참에 닭 울 젠 벌써 수레바퀴 기름칠하네

水鍾山色暮如?/ 雪樹氷泉?待人 / 嶺路鴉?初振策 / 驛亭鷄唱已膏輪

북쪽 산비탈 일천 굽이를 부여잡고 올라가

동화의 만곡 티끌을 맑게 씻고자 하나

이 같은 풍류놀이에 따라가기 어려워

백수로 읊으며 바라보니 마음 진정 슬퍼라

思攀北?千回?/ 淨洗東華萬斛塵/ 如此風流難附尾/ 白頭吟望?傷神

.........도위가 수종사에 놀러 가려 하는데 나는 늙어서 따라갈 수가 없다

[都尉將游水鍾寺 余老不能從]

 

드디어 일흔 살이 되던 1831년, 어릴 때 깡총발을 뛰면 올라갈 정도였던 수종사가 이제 높이 솟은 대나무처럼 느껴지면서 그의 마음의 고향이던 수종사를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이렇게 술회한다.

 

운길산 수종사는 옛적에는 우리 집 정원이었네

마음만 먹으면 훌쩍 날아가서 절 문에 이르렀네

이제 보니 홀연히 대나무 순처럼 뻗어 올라

푸른 하늘 높이 솟아 모연하며 어루만지기 어렵네

水鍾山昔作吾園

意到翩然卽寺門

今視忽如抽竹筍

靑宵玉立杳難?

........밤에 무료하게 누워서 10수의 시를 쓰며 우울함을 그려보다

[夜臥無聊戱爲十絶以抒幽鬱]

 

그로부터 5년 뒤인 1836년(헌종 2년) 2월 22일 조용히 영명하였는데, 마침 이 해는 75살이니까 15살에 결혼하고 60주년이 되던 해였기에, 회혼일을 맞아 족친과 문하생들이 다 모였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공부를 하고 가장 많은 글을 써서 세상을 구하려 했던 경세가인 다산 정약용, 그의 삶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9살 살 때 잃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그의 마음 깊이 각인되어 있던 수종사에 대해서는 그리 잘 조명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어디에 가 있든지 어릴 때 편하게 수없이 오르내렸던 수종사를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처럼 많은 작품 속에 수종사를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천주학을 공부했을 다산에게 수종사는 종교적으로 대치되는 불교의 절로서가 아니라 어릴 때 놀던 고향언덕처럼 그의 가슴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 절을 올라가는 마음으로 그는 다산 초당에 올라가 세상을 위한 학문을 연구했고 그 산에서 내려다보는 그 시야로 고금의 학문을 연구했고, 그 절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그리워해 우리나라 말을 살려 우리나라 풍경을 그린 최초의 기행시집인 송파수작(松坡酬酌)을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산 정약용에게 수종사는 곧 그를 지켜준 바위엄마였을 것이다. 수종사를 걸어 올라가면서 다산의 그러한 일생이 생각난다. 이 산 바위, 나무 하나하나에 다산의 자취가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수종사를 오르는 길은 그냥 보통의 산길이 아니라 다산을 통해 다시 우리들의 삶의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소중한 길이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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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에세이칼럼 블로그 일상다반사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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