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심 프리즘] 시는 무엇이었고 먼저 무엇이 되어야 하나 / 이경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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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도 감읍(感泣)케 하는 소통 지난 7월16일 저녁 인사동에서 열린 두 권의 신작 시집 출판기념 모임에 참석했다. 물파공간 갤러리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의 신작 시집 《흰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천년의 시작)와 주점 시인에서 가진 김영환 시인의 신작 시집 《돌관자여, 흐르는 강물에 갈퀴손을 씻으라》(생각의 나무) 출판기념회.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열렸지만 지난 민주화시대 저항의 상징이었던 두 시인인지라 참석자들 면면이 인사동을 다시 그 저항의 시대로 되돌린 감상에 대책 없이 빨려들게 했다. 그러면서 그 시대를 거친 지금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사회는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또 그 얼마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특히 시집 출판 명목으로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기’에 인간과 사회에 시는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인간성이 흔들리는 이 시대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내 나는 헐벗은 거리에 내던져져 있었다 이제야 한 서투른 두레박인 나 ‘신의 우물’ 곁으로 돌아온다 물이 귀한 시절이다 달이 우물 속에서 미소 짓는다 그늘 속에서 아 검은 그늘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넘나드는 한 울타리 喜悲籬의 하얀 瑞氣를 발견한다 놀랍고 또 기쁜 것은 그것이 우리 옛 오일장의 또 하나의 이름 삶의 또 하나의 이름임을 깨달은 것. 그렇다 이제야 나에게 나를 돌려준다 산알을, 신의 우물로부터 참 산알을. 아, 復勝의 시절이다. 김지하 시인 모임 입구에는 이번 시집의 서시인 위 〈나에게 나를 돌려준다〉 전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이 시를 읽으며, 오랜만에 시인을 보며 나는 “아/ 검은 그늘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넘나드는 한 울타리/ 희비리(喜悲籬)의 하얀 서기(瑞氣)를 발견”했다. 동서고금의 사상과 미학을 아우르며 우주만물의 살림 사상과 소통 미학을 분방하게 시로 펼쳐 보인 게 이번 시집. 그런 시세계를 아울렀을 이 서시 20행을 읽으며 ‘희비리(喜悲籬)의 하얀 서기(瑞氣)’에서 그의 좋은 시에서 종종 전율했던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샤머니즘이나 흰 그늘에 서린 서기를 나는 1994년 나온 시집 《중심의 괴로움》을 읽으며 혹 귀기 아닐까 하고 섬뜩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나이 탓인가/ 눈 침침하다/ 눈은 넋그물/ 넋 컴컴하다/ 새벽마저 저물녘 어둑한 방안 늘 시장하고/ 기다리는 가위 소리 더디고/ 바퀴가 곁에 와/ 잠잠하다/ 밖에/ 서리 내리나/ 실 끊는 이 끝 시리다/ 단추 없는 작년 저고리/ 아직 남은 온기 밟고/ 밖에 눈 밝은 아내/ 돌아온다/ 가위 소린가.” 그 시집을 펴낸 후 6년 만에 발표한 시 “홀로 수천 년을/ 호랑이 등 위에서/ 방울 칼 거울/ 거울 칼 방울/ 칼 방울 거울// 그 사이 성좌는 팔방에 율려를 뿌리고/ 대륙은 끝없이 말씀을 흩었네라// 영축산 비로암 뒤/ 숨죽인 북극전/ 내/이제야/ 문득 알겠구나// 어찌해/당신이/ 서자인지를.” (〈북극전 2〉부분)을 읽으며 그의 귀기 넘치는, 하여 천지를 울리는 시 저 밑바닥에는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구나 하는 내 나름의 생각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웅전 뒤 그늘 산신각이나 북극전 등의 이름으로 겨우 존재하는 단군 이래의 그 샤머니즘. 그날 모임에서 김지하 시인은 “유럽 사람들은 동아시아 샤머니즘에 관심이 높다. 그런데 우리는 등잔 밑이 어둡다. 그래서 이 시집을 맘먹고 썼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이번 시집에 실린 〈유전자 자체〉에서는 “차라리// 반역이나 혁명인 패륜으로/ 그 族譜로부터 추방당해/ 사라진 자들의/ 기이한 전설의 빈틈을 연구해 보라/ 그// 텅 빈 종이 뒤에 서리는/ 흰그늘에서/ 유전자 자체가 어느날 말을 해올 것이다// 그것은/ 바로//空”이라고 시로 말했다. 시인은 컴컴한 죽임의 시대 우주적 산알, 생명으로 나가기 위해 이번 시집에서는 추방당해 사라진 자, 샤먼의 기이한 전설의 빈틈에서 우주적 생명을 보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연대 일찍이 〈타는 목마름으로〉민주화운동을 일궜던 시인이 이제 시로 우주적 생명운동을 일구고 있는 것. 김지하 시인과 그의 시를 잘 아는 시인들도 혹 그렇게 권한 걸로 들었지만 나도 시인에게 운동이나 사상보다 먼저 시로 돌아오시라 말한 적이 있다. 귀신까지 감동해 흐느낄 귀기 넘치는 당신의 그 좋은 시로. 인간과 사회의 이상(理想)에 꽂히는 서정
“나이 어린 江이 시가 되는 것은/ 무덤 없는 이들이 그곳에 몸을 풀었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江이 어둠으로 온전히 갇힌 적이 있는가/ 섬약한 비가 풀잎을 마냥 흔들며 흘러가고 있다” “키 작은 바람이 江가에서 노래가 되는 것은/ 이름 없는 이들이 그곳에서 제 몸을 흩었기 때문이다” 4대강 현장인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둘러보고 강마다 장을 달리한 이 시집의 각 장의 서시로 쓰인 이 짤막한 시들에서부터 강과 하나 된 서정을 감지할 수 있다. 무덤 없는 이들, 사람들이며 모래무지며 풀꽃이며 돌이며 바람들의 생령이 흐르는 강의 모든 것들이 언어가 되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무소유가 된다는 것,/ 그것은 비단 강가에 제 몸을 누이는 일이다// 우리의 강과 산에서 모국어가 하루하루 숨을 쉰다/ 강은 수만 년을 두고 모국어가 모여 만든 외로운 길이다// 돌관자들이여! 금강 비단 물결을 찢어발기는 갈퀴손이여!// 강의 빠가사리에게 물어보라/ 강변의 호박돌에게도 물어보라// 이 공사는 이름 없는 들꽃들의 허가사항이다” 강과 산, 빠가사리와 호박돌과 들꽃들이 모국어가 되어 그들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하여 확신을 갖고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돌관자(突貫子)들에 반대하는 목소리, 전언(傳言)을 더욱더 실감나게, 간절하게 증폭시키고 있다. 그날 모임에서 고은 시인은 “강물의 흐름 같은 운율을 타는 매우 서정적인 시”라고 자신이 금세기 들어서며 강조해오던 ‘서정’을 다시금 부추겼다. 10년 전 고은 시인은 한 칼럼에서 순수성과 삶의 구체성인 리얼리티에 기초한 서정적 감동이 넘쳐야 기능성, 효율성 등만 가치로 내세우는 오늘날 비정(非情)의 문화와 삶의 형식을 깨뜨리며 삼라만상과 감동적으로 같이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 ‘서정의 혁명’을 김영환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본 것인가. 이 시집을 찬찬히 읽고 메모까지 해온 고은 시인은 쓴소리와 함께 서정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영환 시인은 “내가 시를 잘못 써서 4대강 사업이나 잘못된 정책이 밀어붙여지고 있는 것 같다”며 돌관자들은 물론 삼라만상과 간절히 통하는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묵은 녹을 털고 날아가는 새해 아침의 그 자리를 파한 후 원고 상태로 접한 김영환 시인의 위 시 〈까치밥〉을 읽으며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동안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있으며 부지런히 시도 쓰는 줄로만 알아왔는데 시로도 이렇게 한 경지에 이르고 있음에. 적을 향한 화살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묵은 녹 털고 저버릴 수 없는 인간과 사회의 이상을 향해 날아가는 순정한 가슴에, 운동이 아니라 먼저 시를 향해 날아가는 시리게 푸른 순정한 모국어와 시인의 자세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생채기 내지 않는 너와 나의 사잇길 임효림 시인이 세 번째 시집 《그늘도 꽃그늘》(실천문학사)을 펴냈다. 위 시 〈사잇길〉 전문에서처럼 너와 나의 그리움이 사무치는 사잇길, 꽃그늘 같은 언어로 빚은 곱고 아름다운 시집이다. “본래 나는 내 시가 세상을 뒤엎는 혁명의 언어가 되기를 바랐다”고 이번 시집에 실린 〈내 시의 자화상〉에서 밝혔듯 선승(禪僧)이면서도 민주화를 이끈 그의 언어는 혁명의 역심을 품었었다. 그러다 “시인이여!”라며 시인을 선동하고 있는 위 시에서는 잘못된 권력을 향한 역심의 언어가 아니라 ‘꽃밭 사이를 지나가는 향기로운’ 말로 나아가자고 한다. “아무 생채기도 안내고” “아무 상처도 입지 말”게. 지난 반세기 참여시 민중시를 거치며 이러다 시 자체가 증발돼 되레 민중에게 외면당하는 것 아닐까 해 늘 불안했던 대목이 이 시에 이르러 ‘사잇길’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확 풀리는 듯하다. 순정한 세계를 향하면서도 진정 순정한 인간, 낭만이 빠진 시들은 얼마나 건조했던가. 동지와 적을 구분해 정확히 적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 같은 언어들은 얼마나 섬뜩했던가. 그리움, 정(情)을 펴는 서정은 내팽개치고 당위에 주박당해 막무가내의 의지만 시퍼렇게 날 세운 그 언어들은 얼마나 위선적이고 또 가식적이기까지 했던가.
껍질을 벗기면 순결한 속살이 있다 그 속살에는 천둥소리도 들린다 언어이면서도 언어의 지경을 넘어선 좋은 시를 만났을 때 언젠가 불현 듯 ‘시시주선(詩時酒禪)’이란 말이 찾아들었다. 네 글자 한 자 한 자가 똑같이 묘오(妙悟)한 깊이를 지닌 혈족(血族)으로. 해서 어떤 평문에서는 이 말을 제목으로 삼기까지 했었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내내 그 말이 떠오르는 것을 떨칠 수 없었다. 위 시 〈속〉은 권두에서부터 선과 시에 대해 생각게 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말로써 드러낼 수 없는 묘오한 선(禪)적 지경과 그것을 기어코 언어로 표현해내야만 하는 시. “떠나간 기억의 저편/ 첫사랑 같은 천고의 비경이 더욱 적막”한데 “이렇게 바람이 불고/ 자꾸 눈이 내리는 날은/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이 깊어져/ 나는 또 술이 고파진다”는 〈설악에 눈이 내리고〉에서와 같이 적막 속에 ‘천고의 비경’을 보게 하는 술. 마시다보면 어제가 오늘인 듯, 내일이 오늘인 듯, 여기가 거기인 듯 천고(千古)의 시공(時空)이 한순간의 찰나로 겹쳐질 때 터져나온 시의 순정한 속살이 〈속〉 같은 시는 아닐는지. ‘바윗돌’이라는 목석같이 답답한 무기질에서 ‘껍질’과 ‘속살’을 보는 눈과 그 속에서 ‘천둥소리’와 ‘도랑물’ 흐르는 소리를 읽는 귀. 문자와 문자, 행과 행이 곧 역설(逆說)이고 연기(緣起)이면서도 그 선적인 시법, 수사(修辭)의 기교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껍질’과 ‘속살’ ‘천둥’과 ‘도랑물’을 아우르는 시의 순결한 속살, 그 사잇길의 묘오한 지경이 아른거린다. 기러기 떼 지나가듯 〈속〉도 그렇지만 이 시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 ‘단순하게 본다’는 ‘선(禪)’이라는 한자 파자(破字)의 뜻이 환하게 들어왔다. 단순하고 이리 일상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이는 길 자체를 담담하게 드러내는 것이 진짜 좋은 시일 것을. 해서 신경림 시인은 효림 시의 미덕을 “관념에 머물지 않는 실천적 구체성”에서 찾았을 것이다. 구체적 삶의 한 해를 보내는 것을 넘어 이승에서 한 생 잘 마감하고 다음 생으로까지 넘길 수 있는 리얼리티를 〈송년〉의 ‘한 해’는 띠게 한다. 아주 자연스레 절로 ‘지나갔다’는 구체적인 말로. 현실과 이상을 골똘히 여미는 꽃단추
눌러놓았다 날갯짓도 없이, 한동안, 꿈쩍도 않는, 새 비가 몰려오는가 머언 북쪽 하늘에서 진눈깨비 깃털을 흔들고 가는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는 속으로 온 하늘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손택수, 〈새〉 전문 손택수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을 펴냈다. 비교적 젊은 21세기 시인답지 않게 생래적일 정도로 자연과 육화된 서정에 현실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며 서정의 혁명 전위에 선 시인이 한 경지에 들어서고 있음을 위 시로 직감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김영환 시인의 까치는 묵은 녹을 털고 시린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데 이 시에서 새는 공중에 박힌 점처럼 꿈쩍 않고 있다. 모든 시간과 공간, 통시(通時) 축과 공시(共時) 축이 한 점에 모이는 충일된 순간, 그리하여 세계가 처음처럼 낯설게 열리는 순간을 경험한 좋은 시들은 위 시 1, 2연에서처럼 새의 정지비행 등으로 그 긴장된 경지를 묘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연들을 보라. 새는 변화무쌍한 천지의 징후를 골똘히 읽는 점자의 한 점이 되고 허공에 박힌 그 점 속으로 온 하늘이 빨려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이 시에서 새는 지금 이 하늘에 몰려오는 비와 먼 북쪽 하늘의 진눈깨비를 예감하는, 바람과 구름에서 그런 징후를 촉각으로 감지하는 시인의 민감한 안테나로 읽힐 수 있다. 그 안테나는 세대나 시대, 나아가 문명사의 전환을 통 크게, 우주적으로 감지하고 예견하면서도 리얼리티에 부족함이 없다. 꿈쩍도 않고 골똘히 전환의 소식과 징후를 읽고 있는 자세 자체가 시대의 리얼리티를 담보한다. 그러다 온 하늘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급기야는 한 점이었던 새도 시인도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 혹은 우주의 탄생인 빅뱅을 읽게 하는 마지막 연에서 한 소식 한 시인의 경지가 보이는 듯도 하다. “지난날 나는 나무의 속을 들여다보겠다고/ 도끼날 함부로 휘두르던 나무꾼이 아니었던지,/ 쿡쿡 속을 쑤시는 아픔과 함께 못물 위로 파문 져가는 나이테/ 결을 따라 흐르는 음악이여/ 이제 나의 일은 연못을 파는 것,/ 일렁이는 물결로 물기슭을 쳐보는 것/ 몸 밖의 파문과 몸 속의 파문이 부딪힐 때/ 출렁, 떨어지는 바늘잎 하나 가슴에 얹어 본다”(〈송운(松韻)〉 부분) 함부로 무모하게 속의 본질로 직격해 들어가단 눈멀고 상하는 법. 해서 시력(詩歷) 10여 년, 나이 갓 마흔에 시인은 벌써부터 솔바람 소리나 듣겠다는 건가. 아닐 것이다. 좋은 시의 언어들은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징후를 드러낸다. 이 시에서 송운은 바람이 솔가지나 솔잎을 연주하는 솔바람 소리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아니라 바늘같이 작고 뾰족한 솔잎 하나 연못 위에 떨어져 이는 파문의 형상이며 그 결에 따라 “일렁이는 물결로 물기슭 쳐” 내는 소리, 음악이다. 이 시에서 그런 솔잎, “바늘잎 하나”는 위에서 살펴본 〈새〉에서의 ‘새’나 ‘점’과 똑같은 긴장된, 충일된 내적 리얼리티를 띠면서도 우주적 깊이와 넓이를 지닌다. “몸 밖의 파문과 몸속의 파문이 부딪힐 때, 출렁”하는 그 순간은 온 하늘이 한 점 속으로 빨려드는 순간이다. 몸 밖과 몸속이, 나와 우주가 온 하늘의 한 몸, 한 점으로 포개지는 순간이야말로 서정의 요체 아니던가.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꽃단추〉 부분) 그런 순간 이렇게 튼실해 더 아름다운 민들레 같은 리얼리티가 충만한 서정의 꽃을 피우고 있다. 찬바람 드는 틈새를 야무지게 채우는 꽃단추 같은 시를. 시와 자연이 함께했던 시절과는 달리, 특히 시와 운동이 인간적, 사회적 이상과 가치를 향해 함께 날아올라 투옥당하면서도 어찌 보면 행복했던 선배 세대와는 달리, 가치가 그야말로 상품적, 화폐적 가치로만 남은 세대. 그 세대로서 이제 도시에 살며 도시적 삶을 그리면서도 손택수 시인의 이번 세 번째 시집은 전망부재의 시대, 무턱대고 날아오르거나 허둥대거나 기웃거리지 않고 새로운 전망과 가치의 징후를 골똘히 찾고 있는 자세가 믿음직스럽다. 영(靈)과 육(肉), 순정에 봉헌하는 제물
밤은 훨씬 먼저 눈 떠 있었다 거울 속엔 달력 하나. 그러니까 반대로 읽히는 세월 한 자락. 시간은 한밤중 3시에 닿아가고 과로하는구나 미안하다라고 저절로 위로의 말을 유발하는 초침소리 밤의 척추가 근간 문예지에 실린 시들을 쭉 읽어나가다 이 시에 감전돼 그저 먹먹해져 오래 머물렀다. 우주를 개벽시킬 기개로 화통한, 귀신도 감읍할 정도로 모골이 송연한 언어나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대화처럼, 기도처럼 조근조근 정갈한데도 왜 이리 먹먹한 감동이 오는지 읽고 또 읽어보았다. 이 시를 본 시인들, 특히 조선 서정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는 서정춘 시인도 그렇게 감전된 양 “시단의 큰 어른이 시의 밝은 눈 뜨고 우리를 보란 듯 가르치고 있다”고 본 시. 그렇게 먼저 말문을 열고도 그저 숙연해져 정작 이 시에 대해선 말문을 닫게 한 시이다. 치밀하고도 적확하게 짜여 읽기에도 분석하기에도 가히 어려움은 없는 시이다. 그렇다고 학교 시 수업처럼 조목조목 분석하다 보면 감동의 먹먹한 부분은 많이도 사라질 시이다. 분석으로 감동의 먹먹함이 파헤쳐지지 않는 시가 시의 압권 아니던가. 그러니 60여 년을 오로지 시에 봉헌한 원로 시인이 잠 못 이루고 한밤중에 일어난 정황과 그 ‘밤’의 서정적 경과를 그냥 성글게 들여다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바로 전 일은 아득히 먼 세월 같고 먼 과거는 바로 어제의 이야기 같은, 흐르는 시간이 거울 속 달력처럼 반대로 보이는 세월 한 자락. 무어라 어둔 밤의 시간마저 째깍째깍 초침의 소리로 흘러가는가. 그런 시간인데도 시인은 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안식하기를, 충직한 아내가 되어 창가에 앉아 지키겠노라고 한다. 출판기념회에서였던가. 김영환 시인은 “이제 시가 정치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정치가 시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그 말이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에서 조지훈 시인이 역설했던 〈순수시의 지향〉을 떠오르게 한다. “먼저 시가 된 다음 그것이 민족시며 세계시가 될 수 있다.” 우선 시가 된 다음에야 운동도 사상도 종교도 품을 수 있다는 말. 그래야 귀신도 우주만물도 울리고 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시력 60년의 순정으로 오롯이 봉헌한 김남조 시인의 위 시 자체에서 목적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무한대로 번져가는 시의 위의에 고개 숙여지지 않으신가.
이경철 | 문학평론가,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 ||||||||||||||||||||||||||||||
-http://www.yousim.co.kr/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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