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깃국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 시래깃국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한 양문규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식량주의자>를 상재하였다. 이번 시집은 양시인이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10여년 살면서, 아버지와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미각의 움벨트(Umwelt)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1957년 야곱 폰 웩스쿨(Jakob von Vexkll)은 그의 저서<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에서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를 “벨트(Welt)"라고 하였고, 각각의 동물들이 경험 하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현실로서의 세계를 ”움벨트(Umwelt)"라고 하였다. 그는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 라는 명제를 풀어 가면서 지상의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각각의 움벨트가 다르며, 어떤 사물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느끼는 감각세계인 움벨트에 의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고 하였다. 양시인의 시적 자아는 바로 미각을 통한 자신만의 움벨트를 형성하고, 양시인만이 기억하고 느끼는 독특한 미각의 세계를 통해 아버지와 그의 가족의 사랑을 시로 치환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양시인은 수척한 아버지와 함께 먹는 “시래깃국” 속에서 양시인만이 느끼는 독특한 맛, 즉 아버지와 아들만이 갖는 사랑의 맛을 감지하는 것이다. 평생 땅을 섬기며, 땅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양시인의 마음은 시리고 안쓰럽다. 그러나 “시래깃국”을 앞에 두고서는 “일흔도 한참 넘긴” 수척한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아들이“아무런 통증 없이”,“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 같은” 마음으로 밥상을 마주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미각의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양시인은 “시래깃국”의 맛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더 나아가 가족과 이웃들까지도 따스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미각은 어디에 존재할까? 다카기 마사유키는 <인지원리론>이란 책에서 “맛과 색은 마음속에서만 존재 한다”고 하였으며, “물질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감각적 성질은 물질 속에 존재하는 성질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고양이는 설탕을 핧아도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즉 맛이 단 설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냥 “설탕”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고양이는 그의 대뇌 속에서 “설탕은 달다”라는 감각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설탕의 단맛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입안에서는 단맛을 느끼는데, 그것은 대뇌의 활동 속에서 단맛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각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현실로서의 세계인 움벨트(Umwelt)인 것이다. “윗방 수숫대 동가리에 고구마가 들어 있었다/뒤뜰 장독대 옆 배가 불룩한 구덩이 속에는 무가 가득 하였다/곳간 시렁에는 분이 듬성듬성 난 감 껍질이 소쿠리에 수북하였다/(중략),,,,/동생과 나는 딱지치기를 하다가/물컹하게 삶은 고구마를 동치미와 곁들여 먹었다/살짝 얼은 무를 깎아 먹고/무 방귀를 수시로 뀌면서 코를 막았다/감 껍질을 먹다가 하얀 분이 묻은 손가락을 빨아먹었다(겨울이었다 중 일부)”에서 보듯 양시인이 기억해 내는 유년 시절의 움벨트는 이렇듯 다양한 미각의 세계인 것이다. 찬바람이 윙윙 몰아치는 추운 겨울의 밤풍경을 이리도 정겹게 미각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회상해내고 있는 것이다. 양시인이 미각의 움벨트(Umwelt) 속에서 되살려낸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세계 속에는 비틀림이나 화려한 수식어가 없다. 진솔하고, 소박하며 진정성이 가득한 그의 가족사를 함께 따라가며 우리는 그가 미각의 움벨트 속에서 때론 구수한 시래깃국 속에서 따스했으며, 물컹한 고구마의 단맛과 함께 마시던 잇몸이 시리도록 차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 맛으로 또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릴 수 있었음을 보았다. 뿐이랴 돈을 사려고 곱게 깎아 말리고 있는 곳감을 바라보기만 하며 “하얀 분이 듬성듬성 한 감 껍질”까지도 겨울 간식으로 먹었던 알뜰함과 시린 가난에도 딱지를 치며 놀던 순진무구했던 양시인의 유년에게, 그리도 먹고 싶던 “아랫마을 점방에 쌓여 있던 알록달록한 눈깔사탕”을 한 봉지 선물하고 싶다. 그리곤 양지바른 초가 담벼락에 붙어 서서 손가락도 입술도 혓바닥까지도 붉게 물드는 눈깔사탕을 함께 나누어 먹고 싶다. 양문규 시인은 1960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하였다.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등이 있으며, 논저 <백석 시의의 창작방법 연구>, 평론집<풍요로운 언어의 내력>등이 있다. 현재 계간 <시에>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시와 에세이] 값, 10,000원.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신구대학교수 dsseo@shingu.ac.kr)
-'문화저널 21'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