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10-4 오득천조법(吾得天助法)

문근영 2014. 5. 8. 00:31

10-4 오득천조법(吾得天助法)
  글쓴이 : 정 민     날짜 : 2006-11-16 15:29     조회 : 411    

 

4) 오득천조법(吾得天助法) :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라


《주역사전(周易四箋)》은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어서 쓴 글이니, 절대로 사람의 힘으로 통하거나 지혜로운 생각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이 책에 잠심하여 그 오묘한 뜻을 다 통하는 자가 있다면 바로 자손이나 벗일 것이니, 천년에 한번 만난다 해도 애지중지함이 마땅히 보통의 정리에 배가 될 것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示二子家誡]〉






장점을 강화하라


오득천조(吾得天助)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일을 이룬다는 뜻이다. 하늘이 자신을 도와 자기를 통해서 이루고자 한 일이니,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작업을 하든지 무턱대고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잘 파악해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핵심 역량을 집중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다산이 견지했던 핵심가치의 네 번째 지향으로 이 글은 이 오득천조를 꼽겠다. 다산은 자신의 작업 뿐 아니라 제자의 육성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견지했다. 다산 자신은 사변과 궁리보다는 정리와 분석에 탁월한 역량이 있었다. 그의 대부분 작업 대부분이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종합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꿰거나, 복잡한 정보를 간추려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방식인 것을 보아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습관처럼 초록하고 일상으로 정리했다. 계속된 작업 끝에 마침내 그가 건강을 잃게 되자, 주변에서는 쓰러져 못 일어날 것을 염려해 작업을 계속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정약전도 다산에게 편지를 보내 이제 저술을 그만 두고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더 전념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이때 보낸 다산의 답장이다.  


점차 수렴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힘을 쏟고자 합니다. 하물며 풍병(風病)은 뿌리가 이미 깊어 입가에 항상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늘 마비증세를 느낍니다. 머리 위에는 늘 두미협 얼음장 위에서 잉어 낚시하는 늙은이들이 쓰는 털모자를 쓰고 지냅니다. 근래 들어서는 또 혀마저 굳어 말이 어근버근합니다. 스스로 살 해가 길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꾸만 바깥으로만 마음을 내달리니, 이것은 주자께서도 만년에 뉘우치신 바입니다. 어찌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려하면 세간의 잡념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어지러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저술만 못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문에 문득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인법(導引法)은 분명히 유익하지만 게을러서 능히 이것을 하지 못할 뿐입니다. -〈중씨께 올림〉 8-218


이 편지는 1811년, 귀양 온 지 11년 째 되던 해에 쓴 것이다. 이때 다산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가족의 보살핌 없이 강행군을 거듭한 결과였다. 아마 이때 정약전은 오늘날 맨손 체조에 해당하는 도인법을 열심히 해볼 것을 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매우 긴 이 장문의 답장을 보면 다산은 공부를 멈추기는커녕 외려 공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편지만 통해 봐도 이 때 다산은 《주역》의 점치는 법과 화폐 가치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온갖 풀잎과 나무껍질을 채취해서 색색의 물감을 배합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와중에 제자들을 가르쳤고, 지도 제작에 관심을 쏟았으며, 《성호사설》을 간추려 정리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악학(樂學)이라는 강적을 만나 모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 지난 10년간 작업해 온 《아방강역고》를 거의 탈고했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소학주천》과 2천자문 《아학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상서고훈》의 정리도 막 마쳐 정약전에게 감수를 요청한 상태였다.


이 많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여 놓고 있었으니 건강을 상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더구나 대부분 정보를 종합하고 핵심을 간추려 분석하고 정리하는 성격의 작업이었다. 한 주제를 화두 삼아 내면으로 궁구해 들어가는 그런 공부가 아니었다. 당연히 자료의 검색과 정리 확인에 소모적인 육체 노동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산 자신은 치심(治心) 공부에 몰두하려 ‘정좌징심(靜坐澄心)’ 하려 해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지기는커녕 잡념만 들끓어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저술 작업에 매달리게 된다고 했다. 



개성을 추구하라

  

다산은 따지기를 좋아하는 학자였다. 따졌다 하면 문제를 명확하고 선명하게 쟁점별로 갈라냈다. 반대로 관념적 지식이나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힘든 추상적 작업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떤 일을 하던 실제에 바탕을 두지 않는 경우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는 늘 꼼꼼하고 깐깐하게 따져가며 작업했다. 정약전도 다산의 꼼꼼한 성격에 대해 “내 아우가 달리 흠잡을 데가 없지만 그릇이 작은 것이 흠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젊은 시절 문과에 급제한 후 신참례(新參禮)를 할 때도 작은 소동이 있었다. 선배들이 신참들에게 여러 가지 짓궂은 장난을 걸며 괴롭히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었다. 이때 다산은 시종 뻣뻣한 자세로 장난에 응하지 않아 건방지다는 비방이 일었다. 판서 권엄이 이 일을 듣고 다산의 태도를 몹시 나무랐다. 다산이 쓴 답장의 일부다.  


새 급제자의 얼굴에 먹물을 칠하는 장난은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고려 말에 귀한 벼슬아치의 자제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면 문득 붉은 분을 써서 얼굴에 칠하던 것이 오래 되자 장난이 되어 마침내 먹으로 바뀐 것입니다. 대개 나쁜 습속일 뿐입니다.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지라 저 또한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보고 크게 웃는 것이나,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를 줍는 시늉하는  것, 부엉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일 따위는 제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어서, 비록 시키는 대로 해보려 애썼지만 천성이 졸렬해서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고, 팔을 내뻗을 수가 없었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진실로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모멸스런 거동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제가 이에 있어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한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본래의 뜻이 명백하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신 지라 감히 스스로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풀리셨다기에 이에 외람됨을 무릅씁니다.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권판서께 올리는 글〉 8-41


짖궂은 장난 앞에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던 다산의 거동이 눈에 선하다. 그는 이렇게 상황에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 고지식함 때문에 입은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을 끝까지 괴롭혔던 이기경(李基慶)이 자신과 몹시 얹짢은 일이 있은 뒤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부 편지를 보냈을 때도, 다산은 같이 눙쳐서 받아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았다.


이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으니 좋은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마땅히 앞뒤 이야기는 있어야겠지요. 그런데도 싹 빼버리고 하나도 점검함이 없더군요. 그대는 능히 노부(老夫)로 자처하므로 가슴 속에 한 가지 거리낌도 없어 오동나무에 걸린 달이나 버들가지에 부는 바람처럼 텅 비어 맑고 시원스럽겠지만, 이것을 저에게도 기대하셨더란 말씀입니까? 저는 비루하고 인색하여 능히 여기에는 이를 수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그대 또한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을 염려합니다. -〈이기경에게 답함[答李基慶]〉8-81  


이 글만 보더라도 그가 모난 처세로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았을 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도 가차 없이 시시비비를 가려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벼슬길에서 상관의 명령도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끝까지 듣지 않고 대들었다. 자신의 기준에서 바르지 않거나 수틀린 수작은 결코 절대로 그저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산은 이 고지식한 원리원칙 주의를 밀어 붙어 끝내 자신의 학문적 개성으로 만들었다. 삶과 학문을 일관된 질서로 꿰뚫었다.



잘하는 일을 하라


오늘날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강진 시절의 제자들도 다산의 이러한 훈도를 받아 학문의 바탕을 키워 나갔다. 다산은 제자를 기르는 데 있어서도 그의 특장을 살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쪽으로 북돋워주었다.


제자 황상은 ‘성의병심법’에서 살펴본 대로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중의 하나였다. 다산은 그를 시(詩) 제자로 인가했다.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 김정희는 그곳에서 황상의 시를 본 후 다산의 아들 정학연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제주도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편을 보여주는데, 묻지 않고도 다산의 고제(高弟)인 줄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황아무개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를 음미해보니 두보를 골수로 삼고 한유를 근골로 한 것이었습니다. 다산의 제자를 두루 꼽아 보더라도, 이청 이하로 모두 이 사람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또 들으니 황모는 시문이 한당(漢唐)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그 사람됨도 당세의 높은 선비라 할만 하여 비록 옛날 은일의 인사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고 합디다. 그래서 육지로 나서는 대로 그를 찾아갔더니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므로, 구슬피 바라보며 돌아왔답니다. 이제 내가 서울로 왔더니 벌써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군요. 제비와 기러기가 서로 어긋남과 같아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 할 뿐입니다. -〈유산의 편지 별지[酉山書別紙]〉, 황상 《치원유고》 중


다산이 세상을 뜬 뒤에 쓴 훗날의 편지지만, 시골의 서생에 불과했던 황상은 어느새 당대의 추사가 이토록 인정할 정도의 시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중앙무대에서도 다산의 제자들은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에서의 작업은 ‘분수득의법’에서 본 것처럼 여러 제자들이 카드 작업과 받아쓰기, 정리 및 필사, 교정 및 대조, 제본과 검토 등 역할을 분담하는 집체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작업에 투입되는 제자들에게 맡긴 역할도 제각금 달랐다. 특기를 길러 각자의 장점을 향상시켜 주었다. 이청은 경전과 역사 방면의 문헌 대조와 비교검토를 전문적으로 맡았다.  이강회는 경전 연구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윤동은 글씨와 정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자식들도 작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다산이 제자들과 공동 작업을 진행하는 몇 광경을 살펴보자.


지금에 《논어》를 공부하지 않는 자들은 사서(四書)의 밭에 반드시 남은 이삭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굉보(紘父) 이강회(李綱會)가 과거 시험에서 돌아와 발분하여 경전과 예학의 학문에 몸을 돌린지라, 그에게 시달린 바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안경을 쓰고 이에 임하고 있습니다. -〈중씨께 답함[答仲氏]〉8-235


《춘추고징》도 초고는 아들 학유가 받아적었고 두 번째 원고는 이강회가 도왔다고 적고 있다. 《논어고금주》에도 이강회와 윤동이 함께 도왔다는 언급이 보인다. 또 《상의절요》 또한 이강회의 질문에 대답한 내용이었다. 이로 보아 이강회는 사서삼경의 경전 공부와 관련된 학술적 작업에 중심축의 역할을 맡았던 제자임이 드러난다.


경오년(1810) 봄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작은 아들 학유(學游)는 돌아가고, 이청만 곁에 있었다.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 마음을 붙일 데가 없었다. 당시 《시경》을 강의하고 있었으므로, 남은 뜻을 이정을 시켜 받아 적게 하였다. 이때 나는 풍증으로 큰 곤란을 겪어 정신이 맑지 못했다. -《사암선생연보》 중


다산은 유배 초기에 이청의 집에 2년간 머물렀다. 그는 다산의 측근에서 다산의 작업을 가장 많이 보좌했던 핵심 제자다. 이청은 《주역심전(周易心箋)》의 네 번째 원고를 다듬어 완성했고, 위 글에서 본대로 《시경강의보》를 받아 적었으며, 《대동수경》과 《현산어보》의 정리를 도맡아 안설을 얹은 것도 그였다. 《악서고존》의 구술도 이청이 받아 적었다. 이청은 다산이 마재로 돌아온 뒤에도 스승을 따라가서 함께 머물며 다산의 저술을 보좌했다. 《사대고례(事大考例)》는 다산이 범례와 안설을 작성하고, 이청이 편집의 책임을 맡아 첨삭은 다산의 재가를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로 보아 이청은 정보 검색과 편집 및 정리의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던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의 구술을 받아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해서 근거를 보완하는 일은 대부분 이청이 도맡아 했다.


윤동(尹?)은 윤종심(尹鍾心)이 본명인데, 다산이 강진 시기 엮어낸 300여권 저술의 2/3가 모두 그의 글씨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주로 필사의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그밖에 두 아들이 대부분의 정리 작업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이들 몇 사람을 주축으로 해서 다산학단의 공동 작업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사실 다산이 한 것은 기획과 작업 방법을 제시한 것뿐이고 실제 조사와 정리는 제자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무리 과정에서 다산의 안목을 더 거쳐서 최종 마무리되었다. 이렇듯 다산은 제자들의 특장을 파악하여, 그들의 역량에 맞는 작업을 집중시킴으로써  균형을 이뤄냈다. 전체 조직을 장악하는 다산의 용인술이 아주 돋보이는 대목이다.     



독창성을 지녀라


다산에게서 철저한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의 지식경영법을 배워 다양한 독자적 저작을 제출했다. 이들은 스승의 구술을 받아 적고, 범례에 따라 문헌을 뒤져 관련정보를 찾아내던 훈련 과정을 스스로의 작업에까지 미루어 확장시켰다.


큰 아들 정학연은 젊은 날 아버지 다산이 양계를 할 바에는 닭에 관한 문헌 정보와 자신의 기록을 정리해 《계경(鷄經)》으로 엮어볼 것을 권했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가, 원예와 축산 관련 독자 저술인 《종축회통(種畜會通)》 3책을 남겼다. 잠상법(蠶桑法)?재종제론(栽種諸論)?목부(木部)?약부(藥部)?화부(花部)?초부(艸部)?육축부(六畜部)로 구분하여 논한 내용이다. 둘째 아들 정학유도 《시경》에 등장하는 조수(鳥獸)와 초목의 이름을 고증한 《시명다식(詩名多識)》 4권을 남겼다. 두 작업 모두 아버지 다산의 정리 방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이청은 천문과 역상 관련 저술인 《정관편(井觀編)》 8권 3책을 남겼다. 천문 역상에 관련된 동서고금의 학설을 정리한 내용이다. 전체 8편의 끝에는 ‘동국역상(東國曆象)’의 항목을 두어 스승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뒤에 70이 되도록 과거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가, 번번이 낙방하자 낙담하여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앞서 ‘성의병심법’에서 본 다산이 황상에게 준 편지에서 이미 이청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한 언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위대한 스승 아래서 훈도된 자신의 학문적 자신감과 이를 펼칠 길 없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갈등과 번민을 반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강회의 학문적 성과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몇 년 전 신안군 우이도에서 그의 필사본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著)》가 필사본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는 스승이 속담을 분류하여 펴낸 《이담속찬(耳談續纂)》을 보충하여 〈방언보(方言補)〉를 지었다. 또 《유암총서》에는 당시의 현안이었던 배와 수레의 제도 및 그 개선방안에 관한 분석적 논문들이 오롯하게 실려 있다. 그는 유구와 마카오, 중국과 필리핀의 배 만드는 기술을 우리나라의 방식과 상세하게 비교해서 장단점을 분석했고, 서양 선박의 특징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로 부국강병의 기초를 다지려면 배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음을 역설했다.


황상은 《치원유고(?園遺稿)》 2책을 남겼다. 추사 형제가 나란히 서문을 쓰고 있을만큼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추사의 동생 김명희는 그의 시가 다산의 가범(家範)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주목했다. 김명희가 그 시의 소종래를 묻자 황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에 들으니, 선생님께서 두보와 한유, 소동파와 육유 등 사가(四家)야 말로 천고의 빼어난 시인이니, 이 4가를 버리고 시를 하는 것은 바른 법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곁으로 다른 시인은 보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쏟아 사가의 시만 읽은 것이 대개 50여년입니다. -김명희, 〈치원유고서(?園遺稿序)〉 중에서  


이렇게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받들어 그 궤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산은 이렇듯 제자들에게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중심으로 과제를 부여하여 그들의 성취를 고무했다. 앞으로 다산학단과 관련된 자료들은 계속 발굴되어 학계에 풍성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다산학단이 쌓아올린 성과와 제자들로 이어진 지식경영의 실체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다산은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해서 기쁘고, 안 할 수 없고, 내가 다른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라. 자신의 장점을 파악해서 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 저 일 기웃거리지 말고, 핵심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분야를 개척하라. 그러자면 평소에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안목을 갈고 닦아야 한다.   


 

 

 

출처 : 박종국 에세이칼럼 블로그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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