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식]
때때로 시는 혼자서 성립합니다. 때때로 시는 시인과 함께 성립합니다. 피천득은 자신의 유명한 수필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내면세계를 시세계에서 표현하는 시인입니다. 그가 97세까지 이 세상에서 살았지만 그의 수필 세계는 그가 정말로 순수한 소년이라는 비밀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세계의 언어는 너무 단순하여 해석할 필요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시가 독자로 하여금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게 하는 강력한 여운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시세계는 우아한 방식으로 매우 강력하고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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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피천득 수필가 (월간《한국수필》2011년 2월호 수록) |
피천득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 꾸미는 수사학적인 장식 없이 자신의 실제 자아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자면 <가을>에서 하늘이 파랗고 가을이기 때문에 호수가 파랗고, 정말로 파랗다고 그가 그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소년이나 어린아이가 쓸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 만큼 그의 언어가 너무나도 단순하지만, 그의 시세계의 놀랍고도 주목할 만한 양상은 모든 시에서 그의 메시지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세계는 질투가 날만큼 순진하고 우아합니다.
이 더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순수하고 우아한 자아를 인간이 어떻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의 시세계를 감상하면서 독자들이 물어보는 경향이 있는 질문인 것입니다.
금아 시 <가을>의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호수가 파랄 때는
아주 파랗다
어이 저리도
저리도 파랄 수가
하늘이, 저 하늘이
가을이어라
호수에 가 보면 호수의 물이 파랗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피천득은 이 시에서 호수가 저리도, 어이 저리도 파랄 수가 있는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것의 원인을 알게 됩니다. 정말로 파란 하늘이, 그것도 가을의 하늘이 호수에 비추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논리의 전개가 단순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시의 놀라운 점은 단순한 논리가 순진한 언어로 전개되었을 뿐인데도 독자에게 시적 감동을 줄뿐만 아니라 그 감동의 묵중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호수에 가 보면, 대부분의 경우, 아마도 언제나, 호수의 물이 파랗다는 것을 느꼈다는 기억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어느 계절보다 더욱 파란 하늘 때문에 가을에 특히 그러하다는 것을 독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충분히 납득할만한 논리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피천득의 <가을>이라는 시작품이 전달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힘이 전부 다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시가 보여주는 순수함은 동요가 보여주는 순수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시인은 소녀나 소년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시의 순수함에는 힘이 실려 있습니다. 동요의 순수함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힘의 성격, 즉 겉으로는 순수하고 우아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강력한 힘을 이해하는 데에 피천득 문학의 핵심이 놓여 있다고 여겨집니다.
수필집『琴兒文選(금아문선)』의 서문 <신판을 내면서>에서 피천득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문학관을 밝힙니다.
나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하여 가끔 글을 써 왔다. 그리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발표하였다. 시나 수필이나 다 나의 어쩌다 오는 복된 시간의 열매들이다.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하여 쓰는 글”이라는 태도를 기반으로 하면서, 시와 수필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 피천득 문학의 특징들 중 하나입니다. 수필은 그 정의가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전에 어떤 계획이 없이 어떠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느낌·기분·정서 등을 표현하는 산문 양식의 한 장르입니다. 그것은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비교적 짧고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을 가진 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경우에도 그 정의에 있어서는 전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수필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는 면이 많은 문학 장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시가 비교적 짧고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수필과 유사하지만, 기본적으로 산문이 아니라 운문입니다. 그리고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ABC of Reading)라는 책 등 시에 관한 방법론적 저서들은 무척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시는 수필과 달리 형식의 구애를 철저하게 받는 문학 장르입니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장르, 시와 수필이 피천득의 문학에서는 수렴되고 있습니다.
수필 <新春(신춘)>의 다음 구절은 시와 수필이 어떤 점에서 수렴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성격 파산자들이라 하여, 또는 신문 삼면에는 무서운 사건들이 실린다 하여 나는 너무 상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건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소설감이 되고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 이른 아침 정동 거리에는 뺨이 붉은 어린아이들과 하얀 칼라를 한 여학생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우러 간다.
봄이 되면 고목에도 찬란한 꽃이 핀다. “슬픈 일을 많이 보고, 큰 고생하여도” 나는 젊었을 때보다 오히려 센티멘탈하지 않다. 바이올린 소리보다 피아노 소리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병든 장미보다는 싱싱한 야생 백합을, 신비로운 모나리자보다는 맨발로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시골 처녀를 대견하게 여기게 되었다.
피천득은 “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성격 파산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문학평론의 엄밀한 작업에 근거하여 근대소설의 주인공들이 성격 파산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피천득의 느낌, 기분과 정서를 표현하는 수필가적 관점에 의거하면 근대소설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 그리고 “우리들의 대부분이 건전”하다는 전제에 의거하여 피천득은 근대소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성격 파산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저는 피천득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들 중 한 명입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3학년 때인 1974년 피천득 선생님께서 정년으로 은퇴를 하셨습니다. 이런 개인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피천득 선생님의 인생관에 대한 증거를 하나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인 저의 첫 번째 시집 <시론>(1994년)에 수록된 시 <피천득 선생님-인간·3>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 전에 뵈온 생각이 난다, 아직 생존해 계신 것을 신문 지면으로 안다
영국 신사의 중절모, 코트와 단장을 하고 다니셨는데, 아는 이는 미소 짓는다
그런 치장만 아니라면 짝달막한 키에 평범한 노친네련만
온통 틀니를 하셔서 눈감고 감상하시는 영시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 미소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때문이 아니라, 琴兒 그 동심에
선생님 앞에서는 우리 누구도 아이가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
그저 절박하고 궁핍하기만 한 것 같은 대학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낙엽 떨어진 길을 걸으며 아이스크림 사 먹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예 이츠와 엘리어트 사이에 또 하나의 해설이 있었다. 1974년 대형 강의실에서 있었던 은퇴 강의의 제목은 “영문학의 전망”이나 “한국 영문학 연구의 위치”가 아니라 그냥 지난 시간과 비슷한 프루스트의 <자작나무> 강독이었다
“선생님, 우린 악마 같은 녀석들이지요,” 물끄러미 보신다
“자네들같이 깨끗한 사람이 못 간다면 천국에는 도대체 누가 가겠는가”
돌아서면 우리는 또 다른 강경 대치의 무의미 속으로 가야 하는데, 아니
가야 한다고, 못 가면 부끄러워하였는데, 선생님은 저기 천국에 서 계셨다
이러한 문학관은 “신비로운 모나리자보다는 맨발로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시골 처녀를 대견하게” 여기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에서 읽었던 <가을> 같은 시들의 힘 있는 순수함의 발상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피천득은 시를 수필처럼 썼던 것입니다.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느낌·기분·정서 등을 표현하는 산문 양식의 한 장르인 수필처럼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제대로 성공한 것인지 이제 시작품들을 읽으면서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수필 <新春(신춘)>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월은 기온으로 보면 확실히 겨울의 한 고비다. 쉘리의 “겨울이 오면……”이라는 구절을 바꾸어 “겨울이 짙었으니 봄이 그리 멀겠는가?” 이런 말을 해보았더니, 신문사에서는 벌써 “신춘에 붙여서”라는 글제를 보내왔다. 1월이 되면 새봄을 온 것이다. 자정이 넘으면 날이 캄캄해도 새벽이 된 거와 같이,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1월은 봄이다. 따뜻한 4월 5월을 어떻게 하느냐고? 봄은 다섯 달이라도 좋다. 우리나라의 봄은 짧은 편이지만, 1월부터 5월까지를 봄이라고 불러도 좋다.
이러한 수필 <新春(신춘)>의 주제가 시 <早春(조춘)>에 다음과 같이 100% 반영되어 있습니다.
녹슬었을 심장, 그 속에는
젊음이 살아 있었나 보다
길가에 쌓인 눈이 녹으려 들기도 전에
계절이 바뀌는 것을 호흡할 때가 있다
피가 엷어진 혈관, 그 속에는
젊음이 숨어 있었나 보다
가로수가 물이 오르기 전에
걸음걸이에 탄력을 느낄 때가 있다
화롯불이 사위면 손이 시린데
진달래 내일이라도 필 것만 같다
해를 묵은 먼지와 같은 재, 그 속에는
만져 보고 싶은 불씨가 묻혔나 보다
위와 같이 “일찍 오는 봄” 또는 “일찍 느끼는 봄”이라는 점에서 피천득의 수필과 시가 동일한 주제로 쓰인 경우는 드물지만, 대응되는 수필이 발견되지 않는 시편들에서도 수필적 세계관이 발견됩니다. 피천득의 시 <시내>를 읽어보겠습니다.
저 내를 따라서 가려네
흐르는 저 물을 따라서 가려네
흰 돌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
푸른 언덕 산기슭으로 가는 내
내 저 내를 따라서 가려네
흐르는 저 물을 따라서 가려네
시의 내용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해서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기슭의 바위틈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무심코 쳐다보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위틈을 흘러내려가는 시냇물을 무심코 쳐다보았던 이유는 그 흘러내려가는 흐름에 잠시 동안이나마 빠져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천득은 자신의 기분을 거의 형식에 구분을 받지 않으면서도 운문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놓았습니다. 수필처럼 시가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가 성공적으로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 <기다림>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귓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이 시도 내용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해서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수필가 피천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딸 서영이의 성장 과정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피천득의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수필처럼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시의 형식을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피천득 시집 <생명>의 해설을 쓴 석경징은 “읽어서 모를 말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명성 때문에 시가 무작정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담고 있는 뜻을 단번에 읽어내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라고 설명하면서 겉으로는 순수하고 우아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피천득 시세계의 강력한 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경징은 또한 “언어의 극단적 절약, 기법의 정확성만으로는 서술 자체를 철학적 추상성이나 논리적 기호성으로만 지탱하는 것이 되기 쉬워 시에서 윤기나 여유를 빼앗아가는 수가 많습니다. 절약과 여유를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언어의 절약과 정서의 여유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피천득의 시세계가 보여준다고 씁니다. 석경징이 제시하는 피천득 시세계의 특징인 “언어의 절약과 정서의 여유의 공존”이야말로 그의 수필적 세계관의 표현 양상입니다.수필처럼 시를 쓰면서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시인은 천상병입니다. 천상병은 「귀천」의 마지막 연,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로 유명합니다만, 그의 대부분의 시세계는 아래의 <편지>처럼 힘겨운 삶의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천상병의 시를 길게 읽은 이유는 한국문학사에서 피천득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피천득이 한국의 대표 수필가들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시인으로서는 그 수준까지 인가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피천득이 천상병보다 아직까지 덜 인식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어려운 삶에 얽힌 일화들이라는 신화적인 전기를 피천득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신화적인 배경은 길고도 긴 문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곧 사라져버릴 허상일 것이며, 결국에는 문학작품 그 자체의 향유 과정 속에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피천득의 시 <이 순간>은 천상병의 <귀천> 만큼 감동을 주는 삶의 찬가입니다.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가난의 기억이 생생하던 시기에 천상병의 수필 같은 시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 가난의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시기에 피천득의 수필 같은 시가 그만큼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어질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만식
시인. 경원대 교수
[계간《문학과 현실》2010년 겨울호(기획특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