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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⑨ - 이제니 ‘나선의 바람’ 외 11편

문근영 2014. 2. 21. 10:28

 

제11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⑨

[중앙일보] 입력 2011.08.16 00:18 / 수정 2011.08.16 00:29
시인 이제니씨는 시를 쓰는데도 구태여 의미전달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씨는 “하지만 방법의 차이일 뿐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완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사진작가 이에니 촬영]

말의 리듬 자체를 시로 만드는 솜씨
시 - 이제니 ‘나선의 바람’ 외 11편

나선의 바람

기억의 숲에서 망각의 바람까지 우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두울 수 없을 만치 어두워 숲으로 감추고 바람으로 속이고 숲에서 바람까지 나무에서 구름까지 감추고 삼키고 속이고 숙이고 죽이고 묻히고 말리고 밀리고 우리는 뒤에서 우리는 목소리 뒤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은 목소리 뒤에서 몇 발짝 뒤에서 간신히 어제에서 어제로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서 숲으로 바람으로 구름에서 종이까지 어쩌면 거기에서 어쩌면 여기로 나선의 숲에서 나선의 바람까지 어둠은 더 이상 어두울 수 없을 만치 어두워 죽음의 숲에서 기억의 바람까지 어쩌면 이제는 아직도 적어도 걸어서 기어서 숲에서 숲으로 곁에서 곁으로 의지와 망각과 불과 춤과 어둠과 죽음과 거기에서 여기로 여기에서 거기로 이미 드디어 우리는 죽었고 나선의 바람과 숲의 불과 물의 춤에게 드디어 우리는 아직도 우리는 숲과 숲으로 망각과 망각으로 우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조용할 수 없으리만치 조용히 우리는 죽었고 나선의 바람에서 기억의 불까지 아직도 이미 벌써 또다시

시인 이제니(39)씨가 세는 나이로 마흔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시에 비해 이씨 자신은 덜 알려진 편이다. 갑작스럽게 유명해졌다는 얘기다.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가을에 출간한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였다. 제목에서부터 음악성이 느껴지는 시집은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물론 좋다는 평가가 많았다. 올해 미당문학상 후보작들도 호평을 받았다. “말 다루는 솜씨가 젊은 시인들 중 두드러진다”(평론가 김진수), “정확한 의미 대상을 지칭하지 않으면서도 말의 리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돼 깜짝 놀랐다”(평론가 강계숙) 등등.

 구태여 ‘의미 전달’에 얽매이지 않는 이씨 시의 음악적 특징은 그의 이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대학시절 교내 밴드에서 기타를 쳤다. 헤비메탈을 즐겨 연주했다. 질풍노도 같은 세월이었단다. 시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시를 포크송으로 만들어왔다. ‘더블플레이 포임(Double Play Poem)’이라는 부정기 시낭송회를 만들어 시로 만든 노래를 부르고 시 낭송도 한다. 공연 장소는 주로 홍대 앞 카페. 후보작 중 ‘곱사등이의 둥근 뼈’‘나선의 바람’ 등을 노래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씨는 “가사 없이 멜로디나 큰 북소리만 들어도 고양감이 드는 음악 같은 시, 의미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글쓴이의 의도가 드러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이씨가 무의미시(無意味詩)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정한 지향점이 분명히 있”단다.

 가령 이씨는 요즘 ‘나선(螺旋)’이라는 개념에 관심이 있다. 이씨는 문장으로 ‘지금 이 순간’을 정확하게 붙잡는 일은 항상 실패한다고 본다. 그러나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현재를 말하다 보면 앞의 문장들은 차례로 소멸하며 일정한 흔적을 남긴다. 이런 과정이 이씨에게는 일종의 나선형 소용돌이로 느껴진다. 이씨는 또 “현기증·속도감 같은 감각도 나선의 이미지와 통하는 데가 있다”고 말했다.

 ‘나선의 바람’에는 이런 생각이 녹아 있다. 어쩐지 시원(始原)의 서늘한 바람 한 줄기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이제니=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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