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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11

문근영 2014. 2. 20. 13:08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11
 
나민애
□ 이상국, 「흰 웃음소리」, 《유심》 2011년 9/10월.
 
내가 한 철 인제 북천 조용한 마을에 살며
한 사미승을 알고 지냈는데
어느 해 누군가 슬피 울어도 환한 유월
그 사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고
동네 처자는 치마폭에다 그걸 받는 걸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바람이 다 집어 먹고
흰 웃음소리만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북천 물소리가 그걸 싣고 가다가
돌멩이처럼 뒤돌아보고는 했다
아무 하늘에서나 햇구름이 피던 그날은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환해진다
 
* 여기서 이상국 시인은 자신이 보았던 한 장면으로 시를 만들었다. ‘사미승’도 실재하는 인물이고, ‘동네 처자’도 이름을 댈 수 있는 사람이리라. 그런데 살아 숨쉬는 사미승과 동네 처자가 있었던 6월의 어느 날이 시인의 기억 공간으로 들어오자, 그것은 무릉도원이나 별세계에 있음직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사실과는 별개로 상상에서 풍만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한 장면이 만들어지면서 그 장면이라는 의미의 그릇에는 정신적 의미를 담겨지게 된다. 마치 많은 큰어미들과 마님들과 신화소들이 등장하는 서정주의 후기 시에서 속기(俗氣)가 말끔하게 제거한 채 백화된 전설의 세계라고 할까. 이상국 시인의 시에는 이야기도 있고, 이야기가 방만하게 풀리지 않도록 이끄는 일종의 빛-힘이 존재한다.
 
 
□ 최승자, 「아침 햇빛, 코스모스, 다람쥐」, 『물 위에 씌여진』, 천년의 시작, 2011.
 
오늘은 아침 햇빛이 넘 보라살이다
아침부터 누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왜 행복하면 안 되는지
그 신비를 묻고 물으면서
누군가 또 죽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존재의 댄스, 굼벵이 댄스
 
그래도 아침 햇빛, 코스모스, 다람쥐,
사물에 부딪치고 부딪쳐
가볍게 떠오르는 깊은 무의식들
보이지 않는 처절한
그러나 때로는 아름다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고 말했지만
시인들에게는 사물들의 총체가 이미 세계이고
사실들의 총체는 이미 지옥이다
 
(사실들로부터 사물들로 뛰어오르라고
아침은 아침마다 다른 아침이 된다)
 
* 최승자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의 한 편이다. 이 작품이 《현대시학》 9월호에도 실려 있기에 다시 한 번 읽어볼 기회가 되었다. 70년대 생인 필자에게 최승자는 고등학교에서 쉽게 접했던 시인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90년대에 대학에 와서 그의 시집을 뒤늦게 접한 이후로, 필자를 비롯한 70년대생 문청들에게 최승자는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와 동시대인들은 최승자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모르겠지만, 나와 동년배에게 최승자는 불행이나 고통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그 방향으로 몸을 던지는 경이로움이나 비극적 부나비로 보였다. 누구보다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을 생각하면서, 그 정반대의 방향에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극단의 시학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행복과 고통이, 아름다움과 비참함이 서로 반대방향에서 시인을 잡아당겨, 그가 막 찢기기라고 할 듯한 긴장감을 느끼곤 했다. 팽팽히 찢기어가는 그의 세계는 이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아, 그의 작품과 그의 작품을 함께 읽던 시절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 홍사성, 「답안지」, 《시선》 2011. 가을.
 
불교학자 이기영 박사에게 어떤 기자가 당돌한 질문을 했답니다
 
“정년도 하셨고, 얼마 전에는 절친한 서경수 선생께서 별세했습니다 곧 죽음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려는지요?”
 
눈 감고 한참 생각하던 그는 종이 구겨지듯 버석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때 되면 답안지에 이름 석자 써놓고 나가는 거지”
 
* 인생 참 어렵다. 그 인생 좀 미리 가르쳐 보자고, 고등학교에서는 벌써 직업의 세계나 종류에 대해서 수업까지 만든 모양인데, 직업을 미리 맛본다고 해도 대학 전공을 제법 영리하게 결정한다 해도 인생은 역시 어려울 것이다. 죽는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인생의 무의미와 대면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고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의미의 공동화(空洞化)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럴 때 읽은 이 작품은 큰 위로가 될 만하다. 이 시는 책상에 앉아 아는 만큼 성실하고 진지하게 문제를 푸는 것이 인생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시간 종이 치면, 답안지에 이름 쓰고 나가는 거다. 교실 안의 인생과 교실 밖의 죽음이라니, 유쾌하면서도 감동이 있는 인생론이 축 쳐진 마음을 전환시켜 주는 듯 하다.
 

나민애 :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서울대학교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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