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시 / 이건청
무서운 풀
토굴에서 발각된 패잔병의 허벅지에 흰 벌레들이
기어다녔다. 집에 가고 싶어요. 검푸른 얼굴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가 완장을 찬 사람들의 들것에 실려 갔다. 멀찍
이 아이들이 따라갔다. 나는 혼자 남아 뭉게구름 속
매미 소리를 들었다. 매미 소리에 섞여 총소리가 울
렸다. 산굽이였다.
사람들이 죽은 그를 벌레와 함께 묻었다. 땅도 파
지 않은 채 그냥 흙으로 덮었다. 학교길 옆이었다.
이듬해 여름 학교길, 패잔병의 무덤에 검푸른 풀들
이 자라 올랐다. 바람 속에서 조용히 흔들리곤 하였
다. 무서운 풀이었다.
# 아이들의 무의식에 트라우마(trauma)로 자리 잡게 되는 전쟁의 체험은 어떤 무늬로 채색되어 그려질까요? 우리의 정신은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사용하여 생존에 위협적이었던 체험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억압(repression)기제를 써서 무의식의 깊은 창고 속에 숨겨두지요.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고단한 꿈길에선 전쟁의 모든 기억들이 슬쩍 슬쩍 찿아 와 꿈속인 듯 생시인 듯 “비포장 도로 한 켠에서 코피에 전 옷을 입은 아이(사라진 시간 속에서 만난 아이 중 일부)”가 되어 생생하게 감각적 체험을 하게 되기도 하지요.
어느 날 갑자기 “포성이 울고 마을 한켠이 환하더니 개천 위에 놓인 다리가 한켠으로 기울고 끊어진 난간 쪽으로 마을 하나가 부서져 내리는 걸(사라진 시간 속에서 만난 아이 중 일부) 목도하기도 하고, 쪼로록 소리가 나도록 냇가에서 말조개를 찿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문득 “건너편 미루나무 숲에서” “백 마리 천 마리” 매미 떼가 일제히 “적막을 찢고 있는데(어머니의 울음소리 중 일부)”, 미루나무 숲을 향해 통곡하는 어머니를 따라 일제히 “사람소리로 울고 있는 매미 소리에 하늘 한켠이 핏빛으로 번져가는 것(어머니의 울음소리 중 일부)”을 마비된 듯 꼼짝 못하고 듣고 있을 수밖에 없기도 했던 시간들이 진저리를 치지요.
“학교 담벼락도 유리창도 폭격에 흩어지고 없었지만 선생님과 학생들은 나뭇가지에 흑판을 걸어놓고” 즉석에서 만들어진 임간학교(林間學校)에서 “덧셈과 뺄셈을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며 마분지 공책에 답을 적기도 했‘(흑판이 걸린 양지 중 일부)”지요. 아군과 적군이 교대로 드나들 때마다 마을엔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죽은 패잔병을 “땅도 파/지 않은 채 그냥 흙으로 덮었”는 데 “학교길 옆이었다.” “이듬해 여름 학교길,/ 패잔병의 무덤에 검푸른 풀들/이 자라 올랐다. 바람 속에서 조용히 흔들리곤 하였/다. 무서운 풀”이 선연하게 “집에 가고 싶어요.”라며 “검푸른 얼굴이 낮은/소리로 말”하는 소리에 가위 눌리는 “기억의 고집”을 우리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서대선(신구대학교 교수 dsseo@shingu.ac.kr)
-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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